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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금강하구 서천 장암진성은 백제시대부터 군사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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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옛 장항제련소와 마주한 후망산 아래 장암진성(長巖鎭城)은 금강과 서해바다가 만나는 입구에 설치되었던 수군진영성(水軍鎭營城)이였다.

 

장암진성의 수장은 종4품인 만호(萬戶)로 관장하도록 하였다.

 

장암진성은 백제시대 기벌포(伎伐浦), 고려 때 장암진(長巖鎭), 조선시대에는 서천포 장암진(舒川浦 長巖鎭)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곳 장암진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많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1.백제의 부흥군과 나당연합군과의 백강전투와 고려 때 진포대첩의 승전지

 

신라와 당나라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이곳 장암진에 상륙한곳이며, 백제(百濟)가 함락된 후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에서 출전한 왜의 수군과 나당연합군이 장항 앞바다 금강에서 최후의 해전으로 왜군이 패한 백강전투, 고려우왕6년(1380년) 8월 이곳 장암진이 있는 금강 하구에 왜구가 500여척의 선단으로 부두에 정박하고 노략질 하였다.

 

 

고려정부는 해도원수 나세(羅世)장군이 이끄는 100여척의 군사로 최무선(崔茂宣)이 만든 화포로 정박하고 있던 왜구선단 500척을 불태워 수장하고 승전의 대첩을 이룬 역사적인 곳이다.

 

장암진성은 고려시대에는 변방을 지키는 수(戍-변방경비대)자리였다.

 

장암진성은 돌로 쌓은 석성(石城)이다. 조선 중중6년(1511년) 9월에 쌓기 시작하였다가 중지되었고, 중종9년(1514년)에 완성되었다. 장암이란 지명은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처음 등장한다.

 

그 후에도 일제가 강제합병하여 행정구역을 통폐합하기 이전의 구한말 지명은 장암리(長巖里)와 항리(項里)였다.

 

마을 첫 글짜 하나씩 따서 1938년도 장항읍이 태어났다.

 

 

장암(長巖)이란 지명은 장항제련소 굴뚝산인 전망산(前望山)과 장암진성 뒤 후망산(後望山)이 전체가 큰 바위로 이루어졌기에 장암(長巖)이라고 하였고, 항리(項里)는 금강의 입구를 뜻하는 지형의 마을 이름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전망산과 후망산의 이름은 장암진성(長巖鎭城)이 두 산의 아래에 군사시설이 주둔하여 산위에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망루역활을 하였던 산이기에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후망산에는 고려시대부터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운영되어 오다가 서천 남산의 봉수대가 설치되면서 후망산의 봉수대는 폐지되었다.

 

고려 말 목은 이색(李穡)이 지은 한산8영 시(韓山八詠 詩) 중 원산수고(圓山戍鼓)에 원산(圓山-화양면사무소 뒤산)에 “봉화 날리고 수자리 북소리 울린다.”라는 것을 보아도 고려시대부터 봉수대가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암진성의 석재는 후망산의 석재를 이용하여 성을 쌓았다. 재질을 보면 후망산의 바위와 같은 재질로 확인된다.

 

 

장암진성의 뒷산 후망산은 기우제도 지낸 곳이다.

 

“용당에서 남쪽으로 마주 보면 장암포구/그 위에 교목 그늘 아래 황량한 사당/동남으로 향하는 배를 신령에게 비나니/노래와 춤 분분하고 술과 고기도 듬뿍/ 몇 년 전부터 꽤나 심한 풍우의 재해/사람이 불성실해 신령이 복을 안 주는지/ 내가 한가히 노닐지만 마음에 걱정되어/ 천리에 내 낀 파도 괜스레 눈에 그득/” 이와 같이 우리고장 인물 가정 이곡(李穀)선생의 가정집에는 금강을 지나는 배들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음을 알 수 있는 시(詩)가 남아있다.

 

2. 장암진은 고려시대 정치인들의 유배지

 

이곳 장암진(長巖鎭)은 바닷가의 외딴 곳에 수군진영(水軍鎭營)으로 여러 정치적인 인물들이 유배를 오기도 한곳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민왕14년(1365년)에 신돈(辛旽)의 무고로 예성군(芮城君) 석문성(石文成)이 이곳으로 유배당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보면 우왕2년(1376년) 가을 7월에 사헌부가 탄핵하기를, 전교부령(典校副令) 신인보(申仁甫)가 3품 직함을 거짓 칭하였고, 또한 죽은 낭장(郎將) 박동조(朴東朝)의 아내와 간통하였으니 법에 의하여 논죄를 청하여 곤장을 때리고 이곳 장암수(長巖戍)에 귀양을 보냈다.

 

그런데 고려사에도 거론되지 않은 평장사(平章事) 두영철(杜英哲)이 이곳 장암진에 유배당했다고 그 일화가 1656년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와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헌에 반복적으로 실려 있는 점이 이채롭다.

 

고려시대 3명의 유배객 중에 두영철(杜英哲)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656년에 편찬한 유형원(柳馨遠)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의 기록을 보면, 서천군 만호진(舒川郡 萬戶鎭-장암진)에 고려시대 두영철(杜英哲)이 일찍이 정치적으로 이곳 장암진(長巖鎭)에 유배되었는데, 어떤 노인과 친하게 지냈다.

 

그 후 유배가 풀려 조정의 부름을 받고 돌아갈 때에 노인이 말하길 구차하게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에 대해 경계하니, 두영철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훗날 지위가 평장사(平章事-정2품)에 이르렀는데 다시 죄에 걸려 좌천되어 유배가는 길에 이곳 장암진을 지나게 되었는데 지난 장암진 유배당시 친하게 지냈던 노인이 그를 빗대어 노래를 지었다.

 

그 노래가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益齋亂藁)소악부(小樂府)에 전해지는 장암곡(長巖曲)이다.

 

 

“폴짝대는 참새야 너는 어찌하여/그물에 걸린 새끼 참새가 되었나/보라는 눈은 어데 두었나/가련타 그물에 걸린 어리석은 참새여/장암은 사람을 저버리지 않았는데/사람은 어이하여 장암을 저버렸나/----중략--- /가고 오는 길 장암이 우뚝이 내려다보니/갈 적에 명심하더니 올 적에 부끄러움뿐/ --중략 --/떠날 때 준 한마디 경계가 가볍지 않았네/참새가 파닥댄들 어찌 그물을 벗어나랴/맹호가 노리는데 결국 함정에 빠졌구나/--중략--/연자방아 나귀처럼 갔던 길을 맴 돈다네/그대는 다시 천리 먼 길을 유배 가니/--중략--/ 아첨이나 하는 소인에게 말하노니/ 장암곡 이 노래 한번 들어 보아라/”

 

1908년 4월30일자 대한매일신보의 장암진곡의 두영철 유배에 전해오는 기사가 있다.

 

두영철이가 다시 유배 길에 이곳 장암진에 들러 그 노인을 찾았으나. 노인은 바위에 걸터앉아 장암곡의 노래를 불렀다.

 

그 노인은 만나고자 하였으나 홀연 사라지고 만나지 못했다는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3. 일제강점기 장항제련소 부지 확보를 위해 장암진성 석재이용 물막이 공사

 

일제강점기 장항제련소를 건립하면서 부지확보를 위해 장암진성의 석축을 헐어다가 물막이 공사인 축항공사 자재로 활용하여 지금의 장암진성 앞 성곽은 사라지고 없다.

 

이러한 성곽석축이 헐리는 기사가 동아일보 1935년 4월 14일자에 보도되었다.

 

기사내용에, “백제시대부터 운영되었던 수군진영인 장암진성의 성곽이 지난 2월부터 시작되는 조선제련소 공사에 해면 매립하는 자재로 오랜 역사를 갖은 장암진성은 헐리는 중에 있다”라고 아쉬움의 기사가 보인다.

 

 

4. 장암진은 모래찜질의 풍습이 이어지고 있는 곳

 

장암진에 유배 온 유배객들 한가로이 지낼 때 모래찜질을 하였다는 풍습의 장소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조선시대 해동지도를 보면 장암진성과 전망산 장항제련소 바위산 사이로 배가 정박 할 수 있도록 깊숙이 들어온 해안으로 형성되었고 남쪽으로 넓은 백사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장암진의 백사장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온 장항송림리 모래찜질장소는 매립공사로 옛날은 모래사장이 없어짐에 따라 위치가 현재 사용하는 서쪽 편 바닷가로 이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전해오는 모래찜질의인 모래의 날이 음력으로 4월 29일인데, 당초의 모래찜질의 날은 한여름인 말복 전,후로 정해졌었다.

 

중외일보 1928년 8월 12일자 보도에, 서천군의 사욕장(砂浴場-모래찜질장)에 옛날부터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오고 있는 행사로 말복(末伏)을 전.후로 1일 하루에 10,000명이 운집하는데, 장항의 장암에 5,000여명, 마서면 죽산리(하소)에 4,000여명이 대부분 부녀자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모래의 날 행사가 음력 4월 29일로 언제부터 변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래의 날이 음력4월29일로 변경된 것은 10월1일로 지정되었던 군민의날을, 1966년4월29일 비인공업단지 기공식과 서천군청 새 청사 준공식의 뜻깊은 축제의 날 이였기에. 1967년3월22일자 군정자문회를 열어 4월29일을 군민의 날로 변경하게 되었다. 군민의 날 변경과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우리나라 제주도에서도 모래찜질로 무더위 대서(大暑)날에 삼양해수욕장에서 매년 모래찜질을 하고 있고, 일본 가고시마 이브스키 해안가에서도 뜨거운 여름철에, 두바이에서도 한 여름철 달궈진 모래를 맨발로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모래로 찜질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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