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되어야 비로소 한 해가 시작하는 것 같다. 새 학기, 새 자리, 새 아이들, 새 동료들, 새 교실이 주는 설렘은 내가 학생이었을 때보다 훨씬 짜릿하다. 고등학교에서 세 해를 머무르다, 중학교로 온 지 겨우 두 해. 열아홉 살의 아이들과 지내다가 처음 열네 살 아이들을 마주한 2023년,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부족한 점이 참 많았다. 올해는 조금이라도 후회를 덜어내리라 다짐했다. 올해 맞이한 아이들은 생각한 것보다도 더, 매우, 몹시도 귀여웠다. 귀여움이 사랑스러움이 되리란 확신이 들 정도로, 말씨도 마음씨도 몸가짐도 모든 부분에서 애교가 묻어났다. 생각하는 힘도, 몰입하는 힘도 눈에 들어오는 아이들이었다. 함께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어가는 지금에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콩깍지가 아니거나, 콩깍지가 아주 두껍거나일 것이다. 중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중학교에서의 모든 것은 낯설다. 교실 놀이도 없고, 담임 교사 얼굴 보기도 어렵고, 매시간 다른 교사가 들어와 심도 있는 교과 수업을 진행한다. 특히 수업 시간이 늘어나고, 지켜야 하는 규칙도 많아지고, 신경 써야 하는 부분도 쌓여간다. 아이들의 부담을 줄여주면서도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수업과 생활을
선거란 민심을 얻는 정쟁이다. 누가 더 국민의 마음에 가까이 가고, 누가 국민에게 등을 돌렸는지 심판이기도 하다. 그래서 총선 후보들은 유권자의 ‘유’자만 보면 넙죽넙죽 절한다. 그 뻣뻣하고 거드름 피던 그 작자들이 시키지 않았는데 무릎을 꿇는다. 일주일 뒤에는 현수막도 걸고, 마이크를 잡고 정책을 밝히는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즉, 후보 등록일이다. 어느새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야당은 일제히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판을, 여당은 거대 여당의 입법 폭주를 심판하겠다고 외친다. 그렇다 보니 주요 정당의 공천 갈등이 심각한 지경을 지난 자중지란도 곳곳에서 일었다.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가거나, 다른 당으로 옮긴이도 많다. 그러니 출렁이는 민심에 정당들이 희비가 엇갈렸다. 정당과 후보들마다 악재에 숨죽이고 있다. 이런 터에 국민의힘이 여러 악재로 시달린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중심으로 컨벤션 효과도 이제 한계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동훈 위원장의 신비감도 없어지고, 새로움도 없고, 과거 선거판의 답습이니 한계에 와있는 듯하다. 한 위원장이 취임한 뒤 두어 달간은 미래의 권력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게 정치전문가들의 평가다. 그러나 이제 그 효과가 임계치에 도달했다
우리는 서천특화시장 화재 및 전소로 인한 참화를 겪었다. 아직 정부 당국의 공식적인 화재 원인이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추정하고 있다. 그동안 서천특화시장의 누전 위험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지적됐다. 하지만 누구도 전기 누전으로 인한 화재의 위험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가운데 화마의 참사가 다가온 것이다. ‘안전불감증’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이 망국병이 우리 사회를 불안 속으로 휘몰아 가고 있다. 안전불감증이란 위험에 노출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이나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에 대한 의식이 둔해지면서 사고의 위험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안전불감증에 빠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안전 지식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안전은 위험에 대한 예측과 경험적 사례를 통하여 위해 위험을 발굴하고 위험요인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거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러한 예측과 경험이 없다면 당연히 안전불감증에 사로잡히게 된다. 둘째 안전의식 결여이다. 위험성에 대해 인지는 하고 있지만 이를 가볍게 생각하거나 알고 있음에도 이행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귀찮아서, 경험상 사고가 난 적이 없어서, 빨리해야
2월은 스스로를 책망하는 순간이 잦았다. 그래서, 이 문장을 쓰는 내내 마음이 개운하지 못하다. 순간이 잦았고, 여전히 잦은 탓에 순간보다 분명 오래 지속되고 있음을 뜻하는 단어를 붙이고 싶은데 말이다. 글로 표현하는 데에 서툴러서 ‘순간’을 얄팍하게 묘사해 보이는 것은 아닌지 의뭉스러운 구석이 생긴다. 순간으로 끝났으면 하는데 이토록 질기게 이어지는 것은 왜일까. ‘책망’이란 잘못을 꾸짖거나 나무라며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벽한 책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잘못을 찾아야 한다. 이후에 잘못을 꾸짖거나 나무라야 한다. 두 단계를 밟은 이후에 못마땅하게 여기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책망의 순간’이 끝나지 않은 이유는, 잘못이라 여기는 명확한 지점을 찾지 못해서가 아닐까. 그러니까, 못마땅하게 여기기를 반복하고 있으나 못마땅한 대상이 되어야 하는 잘못은 불명확한 상태인 것이다. ‘잘하지 못하여 그릇되게 한 일. 또는 옳지 못하게 한 일.’을 잘못이라고 이른다. ‘잘함’과 ‘옳음’을 기준으로 뒀을 때, ‘옳음’을 잣대로 하여 잘못을 살피는 일은 수월한 편이다. 도덕관념이나 윤리 의식은 생각보다 투철히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
말은 왜 중요한가?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는다 하면 죽고 산다고 하면 산다.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많은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 말은 날개가 있다. 그러나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날아가지 않는다. 엉뚱하게 날아가 싸움이 일어나는 수가 있다.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는 말이 있다. 혀는 강철이 아니지만, 함부로 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충격을 준다. 포르투갈은 냉수 한 모금보다 부드러운 말 한마디가 마음을 진정시킨다고 하였다. 성경은 어리석은 말이나 누추한 말이나 희롱의 말을 하지 말고 돌이켜 감사의 말을 하라고 하였다(마5:3-4) 미국 사람은 ‘땡큐 베리 마취’, ‘아임 소리’, ‘익스큐즈미’란 말을 하루에도 수백 번 하고 잘못을 즉시 인정하여 미안한 마음과 감사의 표현을 하므로 상대방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감사의 언어는 오늘의 미국으로 세계를 지도하는 국가로 복을 받았다. 좋은 말, 허물을 덮어주는 말, 덕 있는 말이 얼마나 좋은가? ‘덕불고’란 말이 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고 하였다. 왜 이간질하고 거짓말하고 가짜뉴스를 전파하는가. 왜 소란을 피우고 혼란의 주인공이 되는가? 자기 자신의
우리 할머니, 정숙 씨는 시래기를 ‘시라구’라고 한다. 우리 할머니, 항희 씨는 달래 간장을 만들어 봄을 깨운다. 어느 한낮에라도 그들을 떠올릴 때면, 머리 위로 남창(南窓)이 큼직하게 생긴다. 고소한 냄새, 향긋한 냄새는 창을 넘어 사뿐히 코끝에 내려앉는다. 냄새는 기억을 불러온다. 할머니들의 주방 한구석에는 꼭 깊고 얕은, 길고 짧은 빗금이 들어찬 비뚜름한 나무 도마가 있다. 빨간 대야는 또 화수분이라, 흙 묻은 감자며 고구마며, 헤진 망 속 양파며 대파며 그득하다. 할머니들의 주방은 시장에서 왔다. 어렸을 때면, 오일장이 열리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달큰하고 바삭한 호떡을 사 먹는 재미, 귀를 막고 ‘뻥이요’ 소리를 기다리는 재미, 어른들로부터 받는 예쁨에 마음이 보드라워지는 재미, (분명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갖게 되면 좋을 것 같은) 이상한 마음을 불어넣는 물건을 구경하는 재미, 두터워지는 할머니의 장바구니를 지켜보는 재미, 코를 막고서는 비린내를 피하려 했음에도 온몸에 비릿한 바다 내음을 묻히고 돌아오는 재미. 나의 오감은 시장의 정취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오감을 만들기만 해도 충분했을 시장은 내게 통각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입니다. 2016년 6월 24일 시작한 연세대 김상근 교수님과의 고전 공부가 지난 금요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친구 강신장 모네상스 대표가 기획한 ‘루첼라이 정원’은 1기 34명으로 출범하여 7년간 봄, 가을 총 13학기 동안 고전을 공부하였습니다. 그중 11학기를 김상근 교수님이 강의해 주셨습니다. 1기 첫 학기가 끝났을 때, 김상근 교수의 강의가 폭발적 호응을 얻어 후학들이 생겨 현재 총 7기가 같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학기별 인원을 합산하면 연인원이 총 3,939명에 이르는 거대한 학습조직입니다. 저는 이 엄청난 학습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과연 이 학습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였습니다. 서양의 엘리트들은 어릴 때부터 고전 읽기를 생활화하고 살아갑니다. 학교에서, 집에서 늘 고전 내용을 접하고 삽니다. 반면 동양에 자란 우리는 책 제목만 알 뿐 한 구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습니다. 인생의 힘든 시기를 만나면 서양의 엘리트들은 학창 시절 읽었던 고전의 구절에서 힘을 얻고 자신의 방향을 재설정합니다. 이제 우리도 ‘루첼라이 정원’을 통해 고전이라는 그들의 ‘인생 무기’를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루첼라이 정
오늘날 많은 사람은 자기 인기를 내세운다. 인간을 우상화하고, 돈을 우상화하고. 권력을 우상화하고 있다. 인본주의 즉 사람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성탄절이 돌아오고 있다. 이때는 사람들이 바쁘다. 여관과 호텔에 예약 손님이 많고 상점과 백화점에는 선물을 주고받으려는 사람들, 한 몫 챙기려는 사람들로 바쁘다. 성경을 보면 성탄을 맞이하는 태도들이 각각 다르다. 1. 당시 헤롯왕은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성탄을 맞이했다. 유대인에게 호기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지었다. 헤롯은 속과 겉이 다른 사람이다. 동방박사들보고 나도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러 가겠노라고 거짓말로 위장했다. 권력 유지를 위해 탄생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죽이려고 2살 아래 어린 아기를 다 죽이라고 명령한 살인자였다. 오늘날도 헤롯과 같은 악한 왕이 있다. 표를 얻기 위해 교인인척하는 정치가들, 권력자들이다. 2. 아부 잘하는 서기관과 제사장들이다. (마2:4-6) 이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요. 성전에서 거주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다. 성경에 예언한 대로 예수님의 탄생을 알았다. 성경을 풀어 베들레헴에 탄생을 알고 있으면서 경배하러 가지 않았다. 성경 연구는 왜 했는가? 성
12월을 보낸다는 것은 내게 단순히 ‘시간이나 세월을 지나가게 하’는 일(표준국어대사전 ‘보내다’ Ⅲ-2)이 아니다. 한 해의 마지막 무렵에서 정말이지 한 해를 ‘놓아주어 떠나게 하’는 일(표준국어대사전 보내다 Ⅲ-1)이다. 연말의 사전적 정의는 ‘한 해의 마지막 무렵’이지만, 여덟 글자로는 부족하다. 연말의 각종 행사들은 분명 싱글생글에 가깝지만, 행사를 제외하고 남은 순간들은 싱숭생숭에 가깝다. 올 한 해도 고생했다면 북돋우는 말들 사이에, 올 한 해에 대한 미련과 후회가 덕지덕지 붙어버린다. 그렇기에 나는 연말을 ‘과거를 곱씹어 완전히 소화시키(어야 하)는 시기, 그러나 과거를 좀먹으며 체해서는 안 되는 시기’라고 뜻매김하고 싶다. 연말이라면, 지난날을 충분히 떠올려야 한다. 순간에 대한 더 이상의 부정은 물려두고 더할 것 없는 수긍을 기하여야 한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되, 사무치지도 파묻히지도 말아야 한다. 이는 나의 속 다짐이다. 시간은 애석하게도 반대로 흐른다. 기쁨에 가까운 때에는 시간에 머물고만 싶지만, 시간은 재빨리 움직이다. 슬픔에 가까운 때에는 시간을 벗어나고 싶지만, 시간은 더없이 머뭇거린다. 나는 연말이면 과거를 들이쑤셔가며 살펴보
사사건건 부딪치며, 생사를 걸고 싸우는 이들이 있다. 대화와 타협은 고사하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죽기살기식 민생을 분탕질 치는 작자들이다. 가족 간식비까지 1년에 수억 원씩 세비를 받아 챙기는 국회의원들이다. 목에 힘이 가득 들어가, 거드름을 피우는 꼴이라는 부끄럽고 불쌍하다.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을 붙들고 앉아서, 말로만 민생이란 이름을 거들먹대는 저 오만과 교만이 똘똘 뭉친 그들이 국민의 혈세로 공짜거나 특혜로 군림한다. 다행히 이들을 싹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넉 달 앞으로 다가와, 오만과 교만의 버르장머리를 고칠 수 있어 감사할 뿐이다. 문제는 4년 전 기울어진 운동장의 분위기 속에 이들에게 표를 던진 우리가 지금 이 꼴을 보고 있다. 정부 부처나 지자체, 시도 교육청 등이 한시가 급한 내년 예산안 처리도 법정시한을 넘긴 채 ‘네 탓 공방’만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국회, 특히 여야는 ‘이동관 탄핵’을 놓고 날을 세우더니 이제는 민생예산은 뒷전인 채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여기에 더불어민주당이 오는 본회의에서 쌍 특검(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특검·대장동 50억 클럽 특검) 처리를 공언한 상태다. ‘탄핵 정국’에 이은 ‘쌍 특검 정국’을 예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2022년 연말 정기 승진 인사를 앞두고 서천군이 시끄럽다. 벌써 ‘복도통신’이니 ‘카더라’ 방송이니 운운하며 승진 유력인사 명단이 세간의 입에 오르고 있다. 구체적인 당사자 실명까지 공개하며 지역 언론에서 조차 5부 능선을 넘었다는 표현까지 서슴없이 뱉어내고 있다. ] 언론의 여론 형성 기능을 악용하여 일부 승진예정자에 대한 풍선효과를 노리고 있는 꼼수라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실제 민선8기 김기웅 군수 취임 이후 일부 언론에서 복도통신이라는 핑계로 특정인의 실명을 거론하며 5부 능선을 넘었다고 대서특필한 사례가 있었기에 우려의 목소리가 팽배해져 가는 것이다. 당시 이 기사는 예측을 빗나간 오보였으며, 5부 능선을 넘었다는 모 인사는 끝내 승진 대상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공직사회에서 승진이란 인생이라는 단어와 비유될 만큼 무거운 의미가 있다. 공직자들에게는 30년이 넘는 시간을 오직 한 가지 희망으로 공직생활을 영위해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초 인사와 승진이라는 것이 피라미드식 구조를 가진 형태이다 보니,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어야 하는 희비의 쌍곡선을 그려내게 마련이다. 다만 이 어려운 구조 속에
2023년 11월 17일 금요일, 첫눈을 보았다. 몇몇은 첫눈은 그것보다 조금 전에 내렸다고도 하고, 또 몇몇은 첫눈은 2023년 1월에 내린 것이라고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첫눈이라고 느낀 그 감상이 더욱 소중하기에 11월 17일의 눈을 첫눈이라고 하겠다. 3교시 3반 수업에 들어가서, ‘얘들아, 방금 눈이 오더라’라는 말을 건넸다. 커튼을 올려두고, 면담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함박눈이 쏟아졌다. 창밖은 온통 하얀 눈방울이었다. 제각기 다른 결정의, 다른 크기의 눈방울을 보고 있자니 괜히 ‘사랑’이 떠올랐다. 단어가 아닌, 감정이 몽글몽글 끓어올랐다.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인생은 꽃, 사랑은 그 꽃의 꿀’이라 했고, 시인 장수양은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커다란 혼자’라 했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사랑은 빠짐없는 문예의 소재이자 목적이었다. 그만큼 사랑은 모두의 교집합이자 이상과 파멸을 그리게 하는, 추상적인 관념이자 철학적인 고뇌인 것이다. 첫눈을 보며 사랑을 떠올린 데에는 약간의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랑에 모양이 있다면, 저 눈처럼 삐뚤빼뚤한 동그라미일 것이라는 생각이 차올랐다. 어떻게 그려도 삐뚤빼뚤한 동그
지난 17일 발생한 정부 행정전산망이 나흘만인 지난 20일 임시 복구됐다. 행안부 고기동 1차관이 지난 19일 밝힌 결과다. 즉, 정부 행정전산망의 서버와 네트워크 장비가 있는 대전의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이하 정보관리원)에 공무원·전문가 100여 명을 투입해 점검, 복구가 확인됐다는 것이다. 직전에 전국 지자체의 전산망 장애를 일으킨 네트워크 장비 등을 교체하고, 실제 민원 현장에서 문제가 재발하지는 않는지도 확인했다. 단지, 지자체 현장점검이 주민센터가 문을 닫은 토요일이어서 평상시보다 사용자 접속량이 매우 적어 평일은 어떤지 월요일에 가봐야 정상 작동을 알 수 있다 했다. 고 차관은 장애의 원인이 네트워크상의 문제로 복구 확인과 함께 정상화를 공표했다. 또 지난 18일 임시로 재개한 정부 온라인 민원 서비스인 정부24도 현재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서비스가 원활하다. 전문가들은 프로그램 업데이트에 사용된 패치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업데이트한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과 충돌하는지를 점검했었다. 여기에다, 항간의 풍문처럼 외부 해킹으로 인해 전산망 장애가 생긴 것은 아닌지도 검토했다. 서둘러 완벽한 복구해 정상화하는 것이지만, 언제 또다시 재발할지 모른다는 점에
인간은 목석(木石)이 아니다. 지정의(知情意) 삼적 요소가 있고 지정, 감정, 의지를 갖고 있으며 이성(理性)과 영성(靈性), 양심(良心)까지 창조주께서 주셨고 선택의 자유까지 주셨다.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셨다. 천지 만물, 식물, 동물, 해물 등 의식주에 필요한 행복한 여건을 조성하여 모든 것을 다 주셨지만 오직 한 가지를 금지시켰고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로 선택의 자유의지를 주시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줬다. 그러나 선택에는 신중해야 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초 에덴동산에서도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함은 나무의 열매는 선택하지 말라고 하셨다. 먹는 날에는 죽는다고 하셨다. 조물주는 인간을 로봇으로 만드시지 아니하였다.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는 판단 능력을 주신 것이다. 항상 우리 앞에는 선과 악이 놓여있다. 인간은 선을 택할 수도 있고 악을 택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진다. 선을 택하면 살고 악을 택하면 죽는 것이다. 자유에도 선택 여부에 따라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요즘 ‘나무처럼 살아간다(리즈 마빈Liz Marvin)’이란 책을 읽는다. 책의 서문은 ‘나무는 정말 놀라운 존재다.’로 시작한다. 내용을 정리하면, 나무는 대략 4억 년 전부터 지구에 존재해 왔고, 그 기간 많은 지혜를 쌓아왔다. 그러니 우리는 나무에서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가을의 나무는 역시 단풍나무와 은행나무 아닐까. 저자는 단풍나무를 ‘시작은 비록 미약할지라도’라는 어구로 설명한다. 아마 짙은 초록을 빨갛게 차츰 물들이는 지난한 과정을, 그로써 가을의 절경이라는 수식을 받는 단풍나무를 표현한 것일 테다. 은행나무는 ‘누구도 완벽하진 않다’라는 어구로 설명한다. 샛노란 은행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말의 의미는 자연히 알 수 있다. 땅에서 2억 년 넘게 살아온 은행나무, 원자 폭탄 투하라는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는 은행나무, 화사한 노랑으로 가득 채우는 은행나무, 구수함보다 구릿함이 잘 어울리는 은행나무이기 때문이다. 가을, 누구나 낭만을 찾을 수 있는 계절. 이즈음에는 다양한 사생대회와 백일장 대회가 열린다. 문예 대회 담당이자 국어 교사인 나에게는 이 계절이 가장 재빠르게 지나갈 수밖에 없다. 충남청소년문학상, 월남문화제 청소년 글짓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