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산의 소소한 이야기] 순항하는 여름, 보리굴비 오차즈케가 품은 묘술

  • 등록 2025.08.27 1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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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저마다 마법을 부리고 있습니다. 해마다 뜨거워지는 여름. 더위를 무찌를 완벽한 방도가 없어, 기꺼이 더위와 함께 살아 내려 묘술을 부립니다. 무기를 들고 더위와 맞선다면, 누군가는 먼저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누군가는 패배에 승복하고 물러서겠지요. 아니면, 끝끝내 싸움을 이어가다 가을의 만류에 이르러서야 겨우 휴전하게 될지도요. 인생이 이미 전투인데, 여름마저 싸워야 한다면 삶은 얼마나 더 퍽퍽하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우리는 더위와 굳이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함께 여름을 나고야 맙니다. “더워야 여름이지”, “더우니까 여름이지”라고 하면서 더위를 싸움의 대상이나 무기를 휘둘러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마법을 부립니다. 이 더운 여름을 그나마 버틸 만하도록, 이 더운 여름이 그래도 좋아질 만하도록, 후끈함 덕에 시원함의 존재를 알아차리도록, 후끈함을 차라리 화끈함으로 받아들이도록 온갖 비책을 선보입니다. 실은 이 마법이 변변찮고 허술해 보이는 데에 반해, 이상하리만치 효과가 톡톡해 묘술이라 적은 것이기도 합니다. 변변찮고 허술한 이 마법,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법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대나무발을 펼치는 것, 한지 부채를 꺼내는 것, 창 위에 풍경을 다는 것, 모기향에 불을 붙이는 것, 방역차를 방구차나 모기차라 부르며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 공원의 분수대를 찾아 나서는 것, 벌벌 떨면서도 납량특집이나 공포 영화를 보는 것, 때로는 《그해 여름》, 《8월의 크리스마스》, 《풀 하우스》, 《커피프린스 1호점》으로 지나온 시절의 여름을 꺼내 보는 것- 기억 속 여름을 떠올리는 것, 《맘마미아!(Mamma Mia!)》, 《중경삼림(重慶森林)》, 《여름밤 열시 반(Dix heures et demie du soir en été)》이나 《해변의 카프카(海辺のカフカ)》로 낯선 나라의 여름을 탐닉하는 것- 꿈꾸는 여름을 느껴보는 것. 늦은 밤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선 밤을 새우다 ‘한여름 밤의 꿈’에 잠기고야 마는 것.

 

계곡물에 발을 담그는 것, 여름 파도 소리를 귀에 담는 것, 산꼭대기 그늘에 몸을 맡기는 것, 느티나무 보호수와 눈을 마주치는 것, 수박 속을 파내서는 사이다를 붓는 것, 복숭아 갈빗대를 들고 새콤달콤함을 맛보는 것, 진한 콩국물에 설탕과 소금을 넣어 한 모금 마시는 것, 놋그릇에 담긴 빙수에 달달한 연유나 시럽을 한껏 뿌리는 것!

 

나의 엄마의 엄마… 혹은 나의 아빠의 아빠의… 혹은 어느 어른의 어른의 어른…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름의 습성이 곧 마법이고, 묘술인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분명 여름 더위에 맞닿는 살갗은 뜨겁다 못해 따갑기까지 한데, 마음은 선선하다 못해 서늘해지곤 합니다. ‘아, 그때 여름에 그랬지’, ‘아, 그때 여름은 이랬지’. 꼭 여름에만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여름이기에 효과가 톡톡한 마법. 이런 묘술을 내일의 나에게, 또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무엇을 남길 건가요.

 

그리하여, 전 여름의 요령으로 ‘보리굴비 오차즈케’를 남기기로 하였습니다. 짭조름한 생선과 고슬고슬한 밥, 감칠맛 나는 시원한 국물 그리고 얼음 몇 알을 한 그릇에 모아 놓으면 마냥 여름입니다. 시원한 여름. 오히려 더워서 좋은 여름!

 

다시마와 멸치 그리고 가쓰오부시를 한데 넣어 육수를 만들어줍니다. 가스불 앞에서 더위는 바깥 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시마, 멸치, 가쓰오부시가 느끼는 더위를 생각하면 더욱이 별것도 아니게 됩니다. 팔팔 끓이는 동안, 냉동 보리굴비를 젖은 키친타올과 랩으로 감싸 전자레인지에 돌려줍니다. (겨울이라면, 후라이팬이나 석쇠에 구웠을 테지만) 여름은 이런 앙증맞은 잔꾀를 이해해 주곤 합니다.

 

육수에 녹차나 말차를 진하게 우려냅니다. 맑은 육수 사이로 녹색 물이 들기 시작합니다. 찬찬히 뻗어나가는 초록은, 꼭 여름 같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여름의 숲은 이럴까, 하는 상념에도 잠시 젖어보면 어느새 국물이 완성됩니다.

 

시원해 보이는 깊은 그릇에 밥을 동그랗게 얹습니다. 잘 익은 자두를 고르듯이, 꼼꼼하게 쌀 한 알도 튀어나오지 않게 모양을 만들어갑니다. 동그랗고 하얀 밥 옆으로 국물을 부어줍니다. 마른 갯벌에 밀물이 들어차듯 쌀알 사이 사이에 국물이 가득합니다. 작은 어선 마냥 얼음 몇 알 띄워주고, 보리굴비를 밥 위에 얹습니다. 우렁찬 뱃고동 소리가 눈에 보인다면, 이 모양새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니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푸른 그릇에 담긴 보리굴비 오차즈케.

 

한 그릇을 해치우면, 바람도 바다도 호령하는 선장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여름, 더위와 함께 순항하는 마법 유랑단들이여- 모쪼록, 무사히 귀항하시기를!

강소산 칼럼위원(시인/서천중학교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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