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가지에 언제쯤 보드라운 바람결이 가닿을까, 내심 초조해하던 지난 3월이었습니다. 입춘을 지나서도, 경칩을 지나서도 찬 기운만이 무성하던 날들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싹눈은커녕, 몇 겹의 성에만 어릴 뿐이었습니다. 따뜻하게 데워낸 입김마저 성에에 얼어붙었고, 기대했던 4월의 밤은 깨질 듯 차가웠습니다.
4월의 언덕을 넘어가며 몇 차례 비가 내렸습니다. 몇 줄기 비의 행렬은, 봄 햇살의 눈물 아니면 땀방울이었을까요? 햇살은 그토록 봄이고 싶었나 봅니다. 찬 공기를 가르며 몇 번이나 울고, 또 얼마간의 땀을 흘렸습니다. 많이 울고, 오래 땀흘린 햇살은 겨우 봄을 피워내고야 말았습니다.
몇 차례의 비를 맞으니, 벚꽃이 휘날리고 흩날렸습니다. 햇살을 받은 벚꽃은 분홍이었다가도 하양이었습니다. 땅 위에 내려 앉은 꽃비는 금세 말랐습니다. 햇살이 봄을 열심히도 키워낸 것이었습니다. 가지는 점차 연두, 초록의 옷을 차려입었습니다. 네, 그토록 고대하던, 정말이지 봄입니다.
저는 곳곳에 민들레가 말갛게 얼굴을 보이는 이 계절이 좋습니다. 너무나도 사랑스럽습니다. 아스팔트 사이에도, 모래알 사이에도, 지붕 위의 흙에서도, 적벽돌 틈에서도 말갛게 웃어 보이는 노오란 뭉텅이들이, 귀엽기 그지없습니다. 기특하기 그지없습니다.
벚꽃도, 동백꽃도, 개나리도, 진달래도 민들레만큼 귀할 수는 없습니다. 그 작고 여린 것이 봄을 피워내기 때문입니다. 자그마한, 엷고 또 얇은 노란 잎들은 열심히도 바람을 닦아냅니다. 어쩌면, 겨우내 쓸쓸했을 그들을 보듬어주는 일을 하는 것에 가까울지도요. 작은 초록이 이토록 많은 노랑을 이고 있는 것은, 수만의 바람을 살펴야 하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민들레의 손길에 노곤해진 바람은, 무던히도 하늘로 오르고 또 올라 온통 노랗게 물들입니다. 따스한 이 봄은 민들레가 빚어낸 작품인 것입니다. 여린 민들레 한 송이가 수만의 바람을 보듬으려 몇 개의 잎을 수없이 피워내는 것일까, 엷고도 얇은 그 잎으로 얼마나 정성을 들여가며 바람을 결결이 살피는 것일까, 생각하면 이 마음에도 퍽 봄이 어리웁니다.
작은 손으로도, (진심만 있다면, 정성을 들인다면) 어느 차가운 것들도 어루만질 수 있는 법인가 봅니다. 작은 손 하나가 몇 채의 고독함을, 몇 점의 고단함을, 또 몇 짐의 고달픔을 지워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민들레가 피워낸 이 봄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봄, 작기만 한 손을 그리 자랑스레 여긴 적 없던 지난날을 돌이켜 봅니다. 항상 땀을 쥐고 있는, 저의 작고 눅눅한 손을 맞잡으니 따뜻해집니다. 작은 손으로는 많은 걸 쥘 수 없고, 눅눅한 손으로는 오래 붙을 수 없습니다. 놓치거나, 미끄러지거나.
하지만, 민들레 꽃잎이 그러했듯, 작고 눅눅한 손은 더 작은 것을,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작은 것들은 작은 손에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정성을 들여, 무언가를 열심히도 보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느 날은, 작은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작고 느린 일 하나를 붙잡습니다. 저는 그럴 때면 팬케이크를 굽습니다. 반죽을 매끄럽게 만들기 위해 몇 번이고 뒤섞고, 천천히 체에 거릅니다. 그리고 아주 약한 불에 올려, 미지근한 온도를 유지해 가며, 버터를 녹이고 닦고를 반복하며 작고 도톰한 팬케이크를 여러 번 구워내야 합니다.
작은 민들레가 봄을 빚는 일, 작은 손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듬는 일은 팬케이크를 굽는 것과 마냥 닮아있습니다. 한 번 굽기 시작하면 사방이 온통 퐁신퐁신한 향으로 채워집니다. 민들레를 담아간 바람이 하늘을 노란 봄으로 채우는 것처럼, 작은 손의 정성으로 구워낸 팬케이크가, 온 집을 보드랍게 채우며 오래 머뭅니다. 그 온기는 한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작은 것들이 피워내고, 빚어낸 봄이 오늘도 우리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는 봄을 서성이기보다, 봄에 머물고 싶습니다. 그래서 순간마다, 작은 손으로 채워갈 수 있는 봄의 모습을 몇 번이고 떠올립니다. 이 봄을 어떤 온기로 채워갈지, 저마다의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 시작은,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작고 여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