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강하게 내리쬐는 몹시 뜨거운 볕’을 뙤약볕이라고 합니다. 뙤약볕은 자신의 이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하루도 게으름 없이 세상을 내리쬡니다. 그렇게 여름의 낮은 차근차근 짙어지고, 제 몫의 더위를 길러 갑니다. 뜨거운 볕은, 무엇인가를 익혀 갈 때 필요합니다. 가을의 수확은 여름의 더위 덕분일 테지요. 그러나 더위는 무엇인가를 상하게 하는 데에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안희연 시인은 “여름은 상하기 좋은 계절이기도 했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렇듯 더위는 익음과 상함,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차라리 익는 여름, 익히는 뙤약볕, 익어 가는 온도가 좋습니다. 그리고 이 여름의 더위 속을 헤엄치다가 문득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더위는 추위를 품을 때 비로소 익음이 되고, 제 열기만을 고집하는 순간 상함이 됩니다. 익음에는 본디 추위가 함께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잘 익기 위해서는 더위도, 추위도 성실히 받아내야 합니다. 잔꾀를 내기보다 계절이 시키는 대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계절은 누구도 빗겨가지 않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라면 누구에게나 볕을 내리고, 누구에게나 바람을 보냅니다. 볕도, 바람도, 비도 제 차례가 되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한 계절 안에서도 더위와 추위를 고루 나누어 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우면 열기를 품고, 추우면 한기를 품으며, 계절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다 못해 끝내 만끽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상하지 않고 잘 익는 방법입니다.
이 여름, 그렇게 정직하게 익어간 것이 있습니다. 녹음 한가운데 여름빛이 번져, 온통 여름으로 물듭니다. 그곳에는 푸른 여름날의 뙤약볕을 하루도 빠짐없이 받아낸 끝에 자신마저 초록과 노랑을 입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초록 잎을 단정히 여민 채, 말갛게 웃는 노랑 하나, 초당옥수수입니다. 바스락 울리는 숲의 노래, 맹렬히 부르짖는 매미의 울음, 부지런히 몸을 타고 흐르는 땀의 소란까지 초당옥수수에게는 알알이 단맛이 되어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환한 빛일수록 짙은 그림자를 남기는 법입니다. 뜨거운 볕일수록 서늘한 바람을 남기는 법입니다. 여름의 뙤약볕은 쉼 없이 세상을 비추고, 잠시나마 숨을 고릅니다. 뭉게구름 속에서, 저무는 시간 속에서 짧은 숨을 내쉽니다. 볕의 숨은 짙은 검푸른 그림자로 고여 갑니다. 깊어가는 여름밤, 서늘한 바람에 달빛이 흔들릴 때마다 밤은 적막을 낳습니다. 달무리가 고요히 울립니다. 그 기나긴 그림자 사이에서 여물어 간 서리태는, 곱게도 검푸러집니다.
여름 한낮의 벌판에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초당옥수수와 엇비슷한 것은, 고작 머리카락을 바람에 맡기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또 어느 여름 한밤의 들판에 가만히 누워 있었습니다. 서리태와 엇비슷한 것은, 고작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들처럼 계절을 고스란히 받아먹으며 잘 익어가고 싶은데, 잔꾀를 부리며 살아가는 제 모습이 조금 우스웠습니다.
그러다가도 하나쯤은 닮아 있다는 사실에 피식 웃음이 새었습니다. 깨달음은 사람을 뿌듯하게도 하지만, 깨달음만으로는 조금 공허한 법인가 봅니다. 결국 잘 익는 일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올여름만큼은 성실히 옥수수와 서리태로 저를 채워나가기로 하였습니다. 여름을 통째로 받아먹은 것들로, 저 또한 여름을 제 안에 들여보기로 하였습니다. 옥수수스프와 콩국수.
여름 볕을 단단히 입은 옥수수를 푹 삶아, 알알이 모아두었습니다. 버터를 녹여 양파와 감자를 천천히 볶고, 옥수수를 넣어 함께 노곤하게 익혀주었습니다. 곱게 갈아 생크림과 우유로 한소끔 끓여내니 노란 여름이 냄비 가득 번졌습니다. 그림자를 닮은 서리태는 찬물에 하룻밤 푹 불렸습니다. 부드럽게 삶아 찬 두유와 함께 곱게 갈았습니다. 얼음과 함께 차갑게 식혔습니다. 면을 담아 검푸른 콩물을 붓고 오이와 깨를 얹으니, 여름밤의 고요가 그릇 가득 번졌습니다.
뜨거운 것도 여름이고, 차가운 것도 여름이었습니다. 계절을 통째로 담아낸 음식을 몇 차례나 먹다 보면, 저 또한 계절을 닮아 조금은 잘 익어갈 수 있을까요. 올여름은 그 두 가지 온도를 천천히 받아먹어 보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