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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석북 신광수 4남매 등 8문장을 배출한 숭문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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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군 기산면 광암리 삼거리에서 화양면 추동리 방향으로 420m 지점에서 활동리를 지나 1㎞쯤에 대등리(옛 숭문북동)마을이 있다. 이곳 마을은 17세기 한집안에서 8 문장가를 배출한 고령신씨(高靈申氏) 석북 신광수(申光洙1712~1775) 4남매와 자녀들이 청빈하게 살았던 숭문동의 선대와 가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골짜기 어귀에는 복사꽃 피어/앞마을 이웃들은 눈이 부시네./시인은 내키는 대로 길을 가노니/봄새는 제철 만나 지저귀누나./세상 길이 한 해 한 해 바뀌어 가도/천기(天機)는 하루하루 다시 살아나네/저녁 바람 흰 머리에 불어오는데/냇가에서 마음을 가누지 못하네.”

 

이 시는 영조 때의 저명한 시인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1712~1775)가 고향 한산의 숭문동(崇文洞-지금 화양면 대등리)에 머물 때 썼던 시(詩)이다.

 

복사꽃 활짝 피어 눈부신 세상이 되면 누군들 들로 산으로 꽃구경 가고 싶지 않으랴? 당시의 숭문동은 복사꽃이 만발하였을 것 같다.

 

 

1. 숭문동 입향조 순창공 신영원

 

고령신씨(高靈申氏) 석북 신광수의 6대조 순창공 신영원(申永源1496∽1572)이 전남 순창에서 한산 숭문동으로 정착하면서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 이윤수(李允秀)의 딸과 결혼하여 숭문동(활동리) 처가에서 살았다.

 

신영원은 아들이 어성 신담(申湛 1519∽1595)으로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이었다.

 

그 후손 신호(申澔)와 성산이씨는 석북 신광수(申光洙), 신광연(申光淵)을 낳고 일찍 돌아가셨다.

 

보령 청라 이천령(李千齡)의 딸인 둘째 부인 전주이씨는 진택 신광하(申光河)와 여류시인 부용당신씨(芙蓉堂申氏)를 낳았다.

 

신광수는 아들 5명을 두었고 숭문동에서 4남매 등 조선의 8 문장가를 배출하였다.

 

신광수의 7대손이 신석초(申石艸-본명 應植 1909~1975)도 1950년대 한국의 대표 시인이기도 하다.

 

 

2. 석북 신광수의 생애 및 활동

 

석북 신광수는 영조 때 남인으로 영의정을 역임한 채제공(蔡濟恭)과 교우하였으나 벼슬길은 순탄치 못했다.

 

남인을 철저히 배척하는 노론들 때문에 17년간 과거를 포기하고 찌든 삶을 살았다.

 

모친께서 한 번만이라도 과거를 보라는 부탁 때문에 늦은 나이 61세에 기로과(耆老科)에 장원급제하여 병조참의와 영월부사를, 1775년 64세에 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가 그 해 파주 장릉(長陵-인조릉)의 제관으로 가던 중 찬비를 맞고 감기로 4일 만인 1775년 4월 26일 사망하였다.

 

그 후 장례는 6월 15일에 한산 숭문동인 신광수의 옛집 남쪽 100m 지점 장사를 지냈다.

 

 

3. 석북 신광수 새집 신축 과정

 

그동안 신광수의 집터에 대하여 알 수 없었다.

 

필자가 석북집(石北集)에서 1749년도 2월 15일자 숭문동에 신광수의 새집을 짓는 토지 축문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집의 위치와 방향 주변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때는 1749년 2월 15일에 고령 신광하(申光河)는 감히 토지의 신령께 고하나이다. 집터는 뒤로 큰 산이 등지고 동북 방향입니다. 집터의 자리는 신비스럽게 빛나며, 드높고 충만합니다, 좌우에 청룡과 백호가 자리하고 그 원기는 극에 달았습니다. 실로 이러함에 나의 집터로 열고자 하나니 새로 짓는 집이 후손들로 하여금 선조(석북 신광수)의 집이라 하게 하소서”--이하생략-- 【維太歲己巳二月己卯朔十五日癸巳。高靈申光河。敢昭告于土地之神。維嶽艮位。赫靈磅礴。爲虎爲龍。元氣所極。實開我基。先祖是宅--】

 

집의 방향은 뒷산 어성산(漁城山)의 높은 산을 동북방향을 등지고 남서쪽을 향하고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을 갖춘 명당임을 밝히고 있다.

 

 

토지신축문은 석북 신광수가 짓고 동생 광하가 고하였다.

 

4. 석북 신광수 학문을 계승한 한산지역 유학자들

 

석북 신광수는 당대의 쟁쟁한 문인, 정치가인 채제공(蔡濟恭), 이헌경(李獻慶), 이동운(李東運)과 만년에는 정범조(丁範祖), 목만중(睦萬中) 등과도 많은 교류를 하였다.

 

그러나 제자로 가르친 문인들은 있었지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한산지역인 화양면 숭문동(활동, 대등)을 비롯하여 대하리, 추동리, 육원리, 봉명리 등에 석북 신광수의 정신과 학문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있었다.

 

추동 덕수이씨 이안진(李安眞-한산군수역임) 6세손 두실 이환모(李煥模1735∽1821), 대하리 나주정씨의 서천 입향조 정휘신(丁徽愼)의 아들 동은(東隱) 정지묵(1748∽1829), 두실 이환모의 학문은 봉명리의 굴재(掘齋) 이방규(李方珪1862∽1947)로 이어졌다.

 

 

두실 이환모는 평생 학문에 전념하였고 부친 이유의 셋째 아들로 많은 글을 남겼다.

 

이환모는 양죽헌 이송년(李松年-초명 이초만) 양죽헌 유고집(養竹軒 遺稿集)의 서문을, 또한 석북 신광수 아들 신석상(申奭相 1737∽1816 정산 현감 시절:1800년)도 서문을 썼고, 봉명리 굴재 이방규는 발문을 썼다.

 

이방규는 동강중학교를 설립한 청암 이하복(李夏馥)선생을 가르친 스승이다.

 

두실 이환모(李煥模)는 문집 두실오언(斗室寤言)의 문집 6권을 남겼지만, 발간되지 못했다.

 

나주정씨인 동은 정지묵(1748∽1829)은 신광수 제자로 평생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말년에 정지묵은 한산 고촌리 문헌서원(文獻書院)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영모리 숭정산 선산에 자리하고 있다.

 

 

그 후손들은 대하리, 기복리에 정착하여 세거하고 있다.

 

5. 석북 신광수(申光洙) 진사(進士) 합격과 숭문동 문희안(聞喜宴)

 

“도홍선(桃紅扇)은 한삼소매 툭 쳐서 날리고/ 우조영산(羽調靈山)은 당세 독보적이라네./ 작별할 때 춘면곡(春眠曲) 다시 한 가락 부르고/ 꽃 떨어지는 시절에 강을 건너 돌아가네”

 

이 시는 우리 고장 숭문동 고령신씨 8문장가를 배출한 사람 중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 1712∽1775)가 1750년 2월 늦은 나이인 39세에 진사과시(進士科試)에 합격하여 고향 숭문동(화양면 대등리)에서 과거에 급제한 자신이 자기 집으로 친구와 친척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 때 당대 최고의 명창이었던 원창(遠昌)의 부채에 써준 석북 신광수의 시(詩)이다.

 

당시에는 노론이 집권하고 있었기에 남인은 정계에 진출하기 어려웠다.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노론계의 인사가 아니면 과시에 합격할 수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면 삼일유가(三日遊街)를 즐겼다.

 

 

과거에 급제한 석북 신광수도 어사화를 꽂고 사흘 동안 시관과 선배, 친척을 방문하며 인사를 드리고 고향에서 문희연(聞喜宴)도 벌였다.

 

석북 신광수 주변에는 장안의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 등 음악인들이 많았다.

 

뒤늦게 진사에 합격한 석북의 삼일유가에 친구들이 동원되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석북에게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 동원된 음악인들, 석북이 지은 시를 노래한 음악인들, 이들 각각이 이루는 교유의 방식과 내용은 달랐다.

 

그 현장 가운데 가객인 판소리 광대 원창(遠昌)은 석북이 노래를 좋아하였기에 39세 늦게 과거급제하고 숭문동에서 축하연을 베풀었던 것이다.

 

아마 이 때에 가객(歌客) 이세춘도 참석하지 않았을까. 석북은 생활이 궁핍하였기에 공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광대 원창에게 출연료를 지급할 수 없었다.

 

 

석북 신광수는 보답으로 출연료 대신 복숭아꽃이 활짝 핀 합죽선에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그 시가 석북집에 남아 있다. 광대 원창은 그것을 받아 귀한 보물로 여기고 돌아갔다.

 

일화로는 석북이 시를 써준 부채를 가지고 궁중의 공연 때도 자랑하고 다녔다고 전한다.

 

석북집에 남아 있는 당시 삼일유가의 모습을 그린 시에 “복사꽃은 취한 듯 버들은 조는 듯/ 쌍적(雙笛-2개의 피리) 소리 봄바람에 말 앞에 서네/ 서른아홉 살 신진사(申進士)를 길가에서 사라들이 가리키며 자신에게 신선(神仙)이라 하네”라고 남겼다.

 

또한 공연장에서는 나이어린 광대도 출연하여 검무와 줄타기 공연도 함께하였다.

 

“연화검무(蓮花劍舞) 작은 홍의(紅衣)/ 칠보(七步-줄타기)로 아슬아슬/ 돌아서며 번쩍 줄 위에서 나네/ 문득 평지로 떨어진 몸은 요지(瑤池-신선이 사는 곳)에서/ 잔치 파하고 돌아온 양”이라고 시로 당시의 모습을 남겼다.

 

판소리 광대 원창은 노비 신분 이였다.

 

 

영암군(靈巖郡) 종면(終面) 무덕정리(茂德亭里) 사는 남평문씨(南平文氏) 문재주(文在主)의 소유 노비로 외지에서 주인의 토지재산을 관리하는 외거노비(外居奴婢)였다.

 

외거노비는 생활에 자유로웠다. 이로 인하여 전국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문재주의 호적부를 보면 모친도 노비로 이름은 취매(翠梅)로 5번째 낳은 노비인 원창(遠昌-1695년생)으로 확인되었다.

 

당시의 거주지는 경상도 남해였으며 석북 고향에서 축하공연 당시 나이는 55세였다.

 

6. 석북 신광수는 청백리로 살았다

 

석북 신광수는 진사에 합격하였는데 영조 임금이 군을 집경당으로 불러 만나 어머니 나이가 몇인지 물어보고 하교하며 이르길 --중략-- “도정 아무개에게 장차 어머니를 모시고 오도록 하려고 하는데, 들으니 집이 없다고 하여 내가 무척이나 가련히 생각한다. 가히 중조(中朝)의 고사를 따라서 호부에 주택 1구를 사주도록 명하고, 그 어미에게 노비 각 1구씩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군은 황공하여 상소를 올려 죽어도 감히 받지 못하겠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들이 아뢰어 이르길 “신광수가 감히 받지 못하겠다는 말이 맞사오니, 일읍(一邑: 한 고을)을 주어 어미를 봉양하도록 하는 편이 낫겠사옵니다.” 하였다.

 

그 아룀을 옳게 여겨 즉시 순천부사를 제수하였다가 다시 영월부사로 제수하였다.

 

이렇듯 석북 신광수는 청백리로 살았다고 번암 채제공의 묘지명에서 기록하고 있다.

 

7. 장사지낸 후 10년 후 다시 개장 합장

 

10년 후 1785년에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신광수 부인 묘와 합장하는 장례식에 참여한 기록이 남아있다.

 

“내 눈물을 흘리며 이곳 묘에서 맹세한 지 십년(1785년) 눈물이 줄줄 흐른다./ 밤 상량위에 달이 뜨면 그대 얼굴이 보이네./ 어찌하여 석북(石北)은 이와 같이 오는가?/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 황홀하게 놀았으면 하네./그대의 훌륭한 문장은 상자에 남겨두고/ 뽕나무 가래나무(고향이란 표현)의 봄 그늘 옛 산에 개장을 맞네./그대 아득하고 먼 그곳 천상의 깊은 궁궐에 모여/ 천상음악의 궁궐에서 옥황상제 가까이 하리라/”

【盟壇老淚十年 潸樑月中宵每見顔 何以得來如石北 怳然遊戲復人間 文章異氣留陳篋 桑梓春陰葬故山 遙想蘂珠宮裏會 塤箎幾許動仙班】라고 개장만사를 남겨놓았다.

 

 

개장만사를 보면 채제공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관직에서 물러나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의 은거 생활 시기이다.

 

개장식에 참석하기 위해 숭문동 재실에서 개장만사를 지은 것이다.

 

지금 석북 신광수의 집터 바로 아래에 1775년도 8월 4일에 터를 잡고 8월 10일에 상량문을 기록한 옛 고택이 공가로 남아 있다.

 

6일 만에 상량할 수 있었던 것은 신광수의 옛집을 헐어다가 재실로 급조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건물 자재를 보면 새로운 목재가 아닌 헌 집의 자재로 사용한 것으로 확인이 된다.

 

새로 밝혀진 문화유적에 대하여 중요한 유적인 만큼 백비(白碑)와 석북 신광수 생가지 및 재실 건물을 보존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8. 철저히 글씨 지워진 석북 신광수의 백비(白碑) 발견

 

숭문동 묘역에는 하얀 백비가 있다. 70여 년 전에 주변에 묻었던 백비를 2014년 시조명칭 유래비 건립 및 석북 문학제를 하면서 발굴하여 세웠다.

 

그동안 종중과 많은 사람이 찾아와 백비에 대하여 비석에 글씨가 없는 청백리인 신광수의 백비로 여겨왔다.

 

필자가 지난 2022년 9월 28일 신광수 묘역에 세워진 백비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백비가 아닌 비석에 새겨진 비문의 글씨가 철저히 지워진 사실을 발견하였다.

 

일부 지워지지 않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

 

서울 종중에 알렸고 지워진 글씨를 판독하기 위해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의뢰하여 판독작업을 의뢰하였으나 철저히 지웠기에 판독 불가로 확인한 바 있다.

 

비문에 새겨진 비문은 석북 신광수와 절친하였던 번암 채제공(蔡濟恭)의 문집에 석북 신광수 묘지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문중이 족보상에도 번암 채제공의 묘비명의 비석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확인을 할 수 있었다.

 

 

글자의 수는 무려 1,900여 글자로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왜 비석의 글씨를 철저히 지웠을까?

 

채제공이 쓴 비문 내용에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중략—“석북 신광수가 일찍이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 관서(함경도)의 비류강에서 배를 타고 놀았다. 하루는 맑은 물이 흐르는 절벽 아래에 정박하였는데, 관서지방 인사들이 찾아와 자리가 비는 날이 없었다. 당시 관서(關西-평안도)의 관찰사인 정휘량(鄭翬良)이 신광수의 이름을 흠모하여 객사에서 만나 교유하고자 하였다. 신광수는 끝내 가지 않았으니 그 자중함이 이와 같았다.--”라며 정휘량의 자질을 논하였다.

 

정휘량은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또한 정휘량의 조카 정치달(鄭致達)의 숙부로 정치달은 영조의 딸 화완옹주(和緩翁主)와 결혼하여 부마가 된 집안이다.

 

당대에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집안이었다.

 

그 후손들이 비석에 대하여 문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로 인하여 권력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비문을 갈아내 훼손한 것으로 보여진다.

 

신광수의 장례의 상황에 대하여도 묘지명에서 밝히고 있다.

 

특히 동생 진택 신광하(申光河)의 행장에 묘역 옆에는 부인의 작은 묘가 좌측에 있으며, 그 해는 합장해서는 아니 되는 해로운 해가 되어 부득이 쌍분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도 고령신씨 집안에서는 비문을 지워버린 사연을 숨긴 채 지내오다가 70여 년 전에 땅속에 묻어버렸다가 2014년에 내용을 모른 채 청백리의 표상인 백비로 알고 다시 세웠던 것이다.

 

비석을 묻은 사실을 알고 있던 종중에서 다행히 알려주었기에 세상에 들어내고 사실이 밝혀지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영원이 묻혀버릴 석북 신광수의 묘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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