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서천문화원에서 ‘2018 중고제 맥잇기 종합포럼’이 열렸다. 중고제(中高制)는 충청지역에서 불리던 판소리 유파의 한 갈래이다. 서천은 당대 5명창 중의 2인이며 중고제 판소리의 마지막 명창인 이동백과 김창룡의 고향이다. 그 인연으로 중고제를 되살리려는 문화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나는 중고제라는 이름이 국토의 중간 지역이라는 의미인 줄 알았다. 이번에 알고 보니 낡은 고물을 뜻하는 중고였다. 판소리는 <고제-중고제-신제>의 단계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예인들에 의해 시작된 초기의 판소리를 고제라 하고 그것이 나름의 형식을 갖춘 단계를 중고제, 1930년대 이후에 전라도를 중심으로 발전한 소리를 신제라 한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서편제와 동편제는 신제에 속한다. 주제발표에는 배연형 전 판소리학회장, 정병헌 전 숙명여대 교수, 주재근 국립부산국악원 장악과장이 나섰다. 이어서 정연창 충청남도 문화유산과장과 한광윤 홍성군 문화관광과장, 이근우 충남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 신웅순 중부대 명예교수가 토론자로 나서 질의응답에 임했다. 발표자나 토론자 면면이 상당했다. 서천의 의견을 내세울 만한 토론자가 없는 점은 아쉬웠다. 그들의 발표에서 중고제의 실상을
△ 강석화 시인 나는 카톨릭 신자이지만 법정 스님을 좋아한다. 김수환 추기경을 존경하는 만큼 법정 스님을 우러른다. 그 분이 쓴 ‘무소유’를 읽으며 이것이 행복의 정답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물질적 풍요는 잠시의 만족만을 줄 수 있다. 한계가 뚜렷하다. 이를 넘어서려면 더 많은 소유가 필요하다. 그것은 길이 아니라고 ‘무소유’는 말한다. ‘무소유’와 닮은 책을 대학 시절에 읽었다. 그리고 이전까지 갖고 있던 삶의 대한 가치관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그때까지 나에게 바람직한 삶이란,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가족을 잘 부양하는 것이었다. 부와 명예, 가족과 건강.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나 말고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은 삶에 대해, 내 자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개미집단의 일개미처럼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실하게 수행해야할 책임을 갖고 있다. 그것은 보람있는 역할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별적인 존재로서 잊지 말아야 할 가치가 더 있다는 것을 그 책은 말하고 있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쓴 ‘월든’이 바로 그 책이다. 월든은 미국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소
판교 산자락에 자리 잡은 지 3년이 되었다. 3년이면 훈련병도 군복을 벗는다. 집을 짓기 전에 주민등록부터 옮겼으니 서류상으로는 4년이다. 이제 잉크는 말랐지만 시골사람 행세하려면 아직 멀었다. 나의 시골행에 대해 지인들은 대개 부러워했지만 몇은 시큰둥했다. 지금은 시골과 사랑에 빠져있어도 3년을 못 버티고 올라올 것이라고 웃으며 악담한 이도 있다. 그 예언은 다행히 빗나갔다. 그러나 못 견딜 만큼의 고난을 겪으리라는 예측은 맞았다. 지난 3년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시행착오를 오로지 몸으로 감당했다. 한옥을 배우러 가서 손가락을 잘린 것을 시작으로 통나무 옮기다가 허리에 금이 가고, 들깨 베다가 인대가 끊어지고, 장작불 피우다가 화상을 입었다. 평생 겪지 않던 부상을 3년 사이에 해치웠다. 그러나 몸이 다쳤다고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 도시에 남았다면 나는 공원을 산책하거나 인터넷을 뒤지며 지낼 것이다. 퇴직한 선배들의 일상이 그랬다. 그들은 여행 몇 번 다녀오고는 쳇바퀴 도는 다람쥐 신세가 되었다. 규격화된 도시 환경은 서서히 끓는 물처럼 사람을 길들이고 개구리를 삶는다. 절박한 막막함이 퇴직을 앞둔 내게 닥쳐왔다. 그동안 사회에 나를 맞춰가며 살았다. 인내
지난 7월 7일 오후 7시 충남 서천군 문예의 전당에서 조영웅과 백유영의 ‘건반 위의 춤’을 아내와 함께 보았다. 공연은 깔끔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래서 시골 무대답지 않았다.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진행자의 멘트와 출연진의 대화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중간에 무대 정리를 하느라 생기는 공백이 없어져서 90분 공연이 훨씬 알차게 느껴졌다. 조영웅과 백유영은 이번 ‘건반 위의 춤’에서 서양음악과 우리 춤의 만남에 의미를 두고 있는 듯했다. 공연의 전반부는 피아노에 맞춰 춤이 어우러졌고 후반부에 우리 춤과 음악의 요소가 강조되는 구성이었다. 서양음악과 국악의 협연은 드문 일이 아니다. 피아노와 춤의 조화도 수백 년 거듭된 작업이다. 그런데도 피아노와 한국무용의 만남은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게 한다. 뿌리가 다른 두 요소의 결합이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에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리아도프의 ‘뮤직박스’가 그러했다. 이 곡은 오르골 인형의 춤을 주제로 한 것인데, 백유영은 한국무용으로 이를 해석해냈다. 서천 군립전통무용단의 예술 감독인 그녀는 발레 동작이 아닌 태평무와 살풀이 등을 등장
6.13 지방선거는 유래 없는 여당의 압승과 야당의 파탄을 가져왔다. 이번 선거는 단순한 정당간의 겨룸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의 오랜 대결에서 보수 진영이 몰락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이 그만큼 진보로 돌아선 것일까? 일방적으로 쏠린 표심은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보수와 진보의 개념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보수는 자본가의 이익을, 진보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좌파와 우파가 있다. 이는 프랑스 혁명 때 국민공회에서 공화파는 왼쪽에 앉고 왕당파는 오른쪽에 앉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급격한 혁신을 주장하면 좌파, 질서와 안정을 우선하면 우파라 한다. 우리나라의 좌파와 우파는 이데올로기의 색채가 강하다. 해방 전후에 공산주의자를 좌익이라 하고 민족주의 세력을 우익이라고 칭했던 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학가에 체 게바라로 상징되는 사회주의 학습의 열풍이 불었고 점차 사회 세력화되자 이들을 좌파라 일컫기 시작했다. 이렇듯 우리의 보수와 진보에는 여러 개념들이 혼재되어 있다. 형식적으로는 진보는 결과의
바야흐로 인문학의 시대다. 5~6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이 이제는 태풍이 되었다. 각종 강연과 책 제목에 인문학이란 꼬리표를 다는 게 유행이다. TV에도 인문학 강연과 토크쇼의 비중이 이른바 식방으로 불리는 음식 프로그램에 버금가는 비중을 차지하는 추세다. 인문학의 영역은 이른바 ‘문사철’로 대표되는 문학·역사·철학을 중심으로 예술·고고학·언어학 등을 망라한다. 넓게 보자면 자연과학이 아닌 영역은 모두 인문학에 점령되고 있다. 최근에는 자연과학자 마저 인문학을 외치면서 텃밭 지키기에 힘쓰고 있다. 인문학의 본질이 인간정신을 탐구하는 것이라지만 최근의 유행은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왜 우리는 갑자기 인문학이 필요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인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별로 실감나지는 않지만 우리는 국민소득 3만 불을 자랑하는 부자 나라에 살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먹고 사는 게 최우선이던 사람들이 삶의 질을 따지게 되었다. 매슬로의 동기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생존의 욕구가 채워지고 나면 사회적 인정과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생존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다른 세계에 진입한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한 지
한국인은 책을 잘 안 읽는다고 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5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하루에 23분씩, 1년에 9.1권의 책을 읽는데 이는 OECD 평균보다 낮은 수치이며 매년 하락하고 있다고 한다. 책을 많이 사고 많이 읽는 사람이 늘고 있는 반면에 전혀 읽지 않는 비율이 25%를 넘고 있어 독서에서도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도서관 이용률이 계속 하락하는 점도 우려스럽다. 독서율이 하락하는 이유 중에는 스마트폰의 보급과 인터넷의 생활화로 정보 습득의 통로가 다양해진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에 의한 단편적인 정보에는 한계가 있다. 독서율 하락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독서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의무적으로 책을 읽어온 것이 아닐까? 공부하기 위해, 교양을 쌓기 위해 억지로 책을 읽어야 했던 기억이 나에게도 분명히 있다. 그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노동이었다. 청소년 시기에는 지식을 위한 독서법이 필요하다. 노력을 해서라도 책을 많이 읽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의 독서는 달라져야 한다. 특히 중년 이후, 삶의 이면을 바라볼 정도의 나이가 되면 더 이상의 지식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착하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착하고 말 잘 듣는 것은 좋은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나쁜 것이라고 배우며 성장한다. 착한 것과 말 잘 듣는 것은 동의어로 취급된다. 선악에 대한 이러한 가치관은 아이들의 심성에 내면화되고 윤리적 판단의 근간이 된다. 부모는 왜 착한 아이를 좋아할까? 공부 열심히 하고 말 잘 듣는 모범생이 사회생활을 잘 하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학창시절 부모의 자랑이었던 모범생이 사회에 나와서는 빛을 보지 못하곤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평범한 월급쟁이의 삶이 그들을 기다린다. 그들이 타락해서가 아니다. 사회생활도 일도 학창시절처럼 열심히 하는 데도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착하고 말 잘 듣는 것은 타인의 관점에서 평가되는 것이다. 착한 아이가 되려면 자신의 말과 행동을 타인의 시선에 맞춰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주장하기보다는 타인의 말에 집중하고 그에 일치하려 애쓴다. 그러면서 자기 판단을 숨기거나 유보하는 데 익숙해진다. 그러므로 말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고 가르치는 교육은 아이의 팔 다리를 자르는 형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양반과 중인, 상인, 천민으로 나뉘던 사회적 계급은 왕정체제와 함께 사라져 평등사회가 구현되었다. 절대적 기준에서의 삶의 질이 분명히 나아졌고 기아와 질병의 위협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부와 가난의 대물림 현상이 굳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새로운 사회적 계층이 분화되고 있다. 사회가 건강하려면 능력에 따라 계층 간의 이동이 원활해야 한다. 이제까지 신분 상승을 위한 가장 확실한 대안은 교육이었다. 예전에는 두메산골 아이도 머리 좋고 열심히 공부하면 서울대, 연고대에 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림도 없다. 서울 강남의 유명 입시학원과 고액 과외를 받는 아이들을 당해내지 못한다. 지방학생을 우대하는 정책이 있다지만 서울대에만 겨우 적용될 뿐이다. 우리의 교육제도는 95%의 청소년을 낙오시키는 시스템이다. 2017년 수능 시험생은 605,988명이다. 4년제 대학의 입학정원은 329,885명이다. 반 수 가까이 무조건 탈락한다. 서울 소재 대학의 입학정원은 8.7%이며 10위권 대학은 5%도 안된다. 요컨대 대부분은 축제의 들러리가 된다. 공부 잘해서 입신양명하던 시절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천행으로 일류대에 들
공연 후기를 쓰는 일은 즐겁다. 공연자가 최선을 다해 내게 보여준 것에 대해 내가 다소나마 보답할 수 있어서다. 서천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제아X박주원의 콘서트에 다녀왔다. 그들의 팬은 아니지만 서천에서 쉽지 않은 유료공연이라는 점에 끌렸다. 조금이나마 이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서천군민은 반값 할인을 해준다. 도긴개긴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서비스는 서천 사람으로서 뭔가 대접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깍아주는 걸 마다할 사람도 없으니 좋고 공연자도 기왕이면 좀 더 객단가 높은 공연을 하는 셈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다. 한편으로는 먼 길 오는 외지 분에게는 차비라도 깍아줘야 할텐데… 좀 미안하기도 하다.^^ 공연은 만족스러웠다. 두 뮤지션이 각자의 색깔을 보여준 무대였다. 나는 그들의 음악을 처음 들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농담처럼 주고받는 짧은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꿈과 도전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제아는 ‘브라운 아이드 걸스‘라는 그룹의 리드보컬로 활약하고 있다. 솔직히 나는 이전까지 제아를 몰랐다. 이문세는 좀 알아도 아이돌그룹은 잘 모르는 세대인 탓이다. 이문세와 아이돌의 음악은 발라드와 클럽뮤직 만큼이나 다르다. 하지만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의 시 ‘광야’의 끝 구절이다. 육사는 고난을 풀어줄 존재로써 초인을 노래했다. 과연 초인은 누구이며 언제 나타날까? 초인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 하늘을 날고 산을 움직인다. 병든 자를 일어서게 하고 수천 명을 일시에 살상할 수도 있다. 이는 초인에 관한 묘사이며 동시에 현대인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수십만 년에 걸친 호모사피언스의 평균적인 능력을 기준한다면 현대인의 능력은 인류의 범주를 뛰어넘는 경이적인 수준이라 할 것이다. 현대인의 일상적인 대부분의 행위는 과거에는 불가능하거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구약성서에서 신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내 명령을 잘 따르면... 나는 제철에 비를 내려...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거두게 할 것이다... 너희는 배불리 먹고 만족스러울 것이다.” 이 정도의 조건이라면 요즘 세상에서는 농수산부장관에게나 어울릴 법한 공약이다. 우리는 비를 내리게 할 수 있고 최신 농법과 비료로 작물의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굶주림보다 과식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을 이룩했다. 불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마광수씨가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는 연세대 국문과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했다. 34살 젊은 나이에 모교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27살 때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39살에 첫 소설을 출판했다. 그가 쓴 ‘즐거운 사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등은 주목을 받았고 거센 역풍을 맞았다. 그의 작품들은 음란 외설물로 평가절하되었고 검찰은 그를 사법처리했다. 그는 우리 문학이 지나치게 엄숙하고 교훈적이며 따라서 위선적이라는 입장이었다. 건전한 사회를 지향한다면 솔직한 성 담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아마도 그가 교수가 아니었거나 제5공화국 시절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주장은 유별난 사람의 기행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음란물 제조혐의로 최종 유죄판결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고 직장에서 해고되는 사태까지 이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주목받는 문단의 신진이었고 명문대 교수였다. 게다가 지식인들이 독재에 저항하던 시대, 즉 문학의 교훈성이 가장 고조되던 시기였다. 그의 도발이 사회에 대한 조롱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닐까? 그는 가혹한 비판을 받았고 매장되었다
아직 공짜공연이 대세인 서천에서 모처럼 유료공연이 있었다. 1만원의 입장료가 미안해질 정도로 공연은 훌륭했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관객의 대부분은 노인과 아이들이었다. 무료초대권이 많이 뿌려진 듯했다. 객석은 어수선하고 카메라 플래시가 계속 터졌다. 스탭들은 공연 중에도 무대 주변을 들락거렸다. 나는 공짜 공연을 좋아하지 않는다. 멋진 공연도 공짜가 되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공연자도 실수나 빈약함에 대해 무감해진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은 괜히 생겨나지 않았다. 공짜공연에 익숙해진 공연자는 재주꾼에 지나지 않는다. 관객은 일 없는 사람들로 머릿수만 채운 박수부대가 된다. 공짜공연의 일상화는 무대와 객석의 질을 동반하락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될 수 있다. 일부 지자체에서 시도하는 ‘천원 콘서트’ 등이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부담 없는 금액으로 알찬 공연을 즐기게 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성장단계의 공연단체에게 무대를 마련해주는 기회가 되고 주민들은 폭넓은 문화예술을 자기 판단으로 구매하는 소중한 경험을 쌓게 된다. 사회복지의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갈수록 늘어나는 무상복지는 국가재정을 좀먹고 수혜자의 사회의
어떤 이가 ‘부자 되세요’라고 인사를 하며 간다. 나는 아직 부자가 아니므로 괜찮은 인사말이다. 꼭 부자가 아니더라도 삶이 초라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재산은 필요하다. 재산이 재물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알더퍼는 인간의 욕구를 생존과 인정, 성장의 3가지로 분석했다. 이를 충족시킬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내가 원하는 3가지 재산이 있다. 그것들은 배와 가슴과 머리를 위한 재산이다. 그 첫 번째는 배를 위한 재산이다. 유감스럽지만 그것은 돈이다. 돈이 있으면 배짱이 는다. 소인도 부자가 되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사마천은 말했다. 이는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적 능력을 갖추게 됨을 의미한다. 갤브레이스가 정의한 것처럼 현대는 불확실성의 시대이므로 적어도 남에게 신세지지 않는 현재와 노후를 염려하지 않을 정도의 돈은 꼭 필요하다. 특히 노후가 불확실한 상태에서의 삶은 늘 긴장 속에 과도해지게 마련이다. 노후보장이 확실한 유럽의 젊은이들은 일 년 모은 돈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재산으로서의 돈이란 저축을 뜻한다. 돈의 가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다. 저축을 하면 배가 든든해진다. 하고 싶은 일을
새 프랑스 대통령이 된 에마뉘엘 마크롱의 나이가 화제다. 39세의 그는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의 가장 젊은 리더가 되었다. 젊은 만큼이나 그의 정치 노선도 개혁적이다. 그는 극심한 좌우대립에서 벗어나 실용적인 중도좌파를 지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적으로는 친기업적인 우파이며 정치사회적으로는 불평등 해소를 우선하는 좌파다. 이른바 ‘제3의 길’을 프랑스가 앞으로 어떻게 걸어갈지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근 서구에서는 30~40대의 젊은 리더들의 약진이 눈에 띈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가 유명하지만 그리스, 벨기에, 폴란드, 헝가리도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그들은 탈 기성정치를 지향하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이탈리아의 마테오 렌치 전 총리처럼 개혁을 서두르다가 좌초하는 경우도 있다. ‘제3의 길’이란 영국의 사회학자 엔서니 기든스가 주창한 실용주의 중도노선을 일컫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이념 모델로 제시되었다.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의 ‘신좌파노선’과 독일 슈뢰더 총리의 ‘새로운 중도’, 프랑스 죠스팽 총리의 ‘현실적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유럽 중도좌파의 정치 이념으로 떠오르며 세계적인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