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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산의 소소한 이야기] 기다림의 미학, 물잠뱅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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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바다에 담깁니다. 여름 바다에는 뽀얀 구름이 담기고, 겨울 바다에는 뿌연 구름이 담깁니다. 바다는 드높은 하늘을 담다가 별안간 버거운지, 계절이 진해질수록 차라리 바다는 하늘을 닮기를 택합니다.

 

옅어질 대로 옅어진 여름 하늘 아래, 바다는 옅게 번집니다. 짙어질 대로 짙어진 겨울 하늘 아래, 바다는 짙게 물듭니다. 바다는 하늘을 담아내다가 닮아갑니다.

 

겨울 바다의 위악에 노인의 주름진 손은 기운 데 또 기운 그물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섬집아기 시절로 돌아간 양, 팔 베고 스르르 기다립니다.

 

쉴 때 쉬라는 바다의 위선 같은 배려일지 모른다고 되뇌며 기다립니다. 노인의 얼굴 앞으로 먹빛의 바다 거품이 성큼 가닿습니다. 듬성드뭇한 수염에 튄 바다 이슬은 금세 얼어버립니다.

 

바다의 깊은 곳은 캄캄합니다. 바다의 아린 추위에는 끄떡도 않고, 오히려 바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또 하나의 노인이 있습니다. 가장 추운 때에, 가장 뜨거운 숨을 내뱉습니다.

 

물메기는 새로운 생을 낳고, 자신의 생을 마무리할 채비를 합니다. 아무리 차가운 겨울 바다라도, 차가운 물속에서도 생명을 품고 낳는 꿈은 끓어오릅니다.

 

겨울 하늘을 닮은 바다에는 두 노인의 생애가 담깁니다. 바다 밖, 생계의 순간을 기대하는 노인의 생애가 녹아있습니다. 바다 안, 생사의 순간을 고대하는 노인의 생애가 녹아있습니다. 바다에는, 노인의 시간이 우러납니다.

 

노인의 유구한 세월과 노인의 숭고한 염원, 그리고 이것들이 바다에 모여 녹아들고 우러나기까지의 시간이 겨울의 맛을 빚습니다. 그래서 겨울 바다의 맛은 늘 늦게, 뜨겁게 도착합니다.

 

어스름한 새해의 새벽, 잔잔한 물결 위로 몇 척의 배가 흔들립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배는 마냥 주인을 닮았습니다. 배를 침범하고야 만 샘 많은 바닷물은 눈치는 있는지, 찰박이다가도 무거운 고무장화를 이끄는 노인에게는 길을 내어줍니다.

 

주름진 노인의 손은 추위를 모르고 움직입니다. 몇 번을 덧기운 그물은 짠 줄도 모른 채 바닷물에 엉겨 붙어 있고야 싶습니다.

 

장날의 시장에는 늙은 어부의 손을 거친 물메기가 놓입니다. 찬 바다에서도 뜨겁도록 투명한 알을 낳은 공로는 격찬받아 마땅합니다.

 

생을 품고 낳아 본 노파들은, 그 진가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노파들은 거친 풍랑이 어린 생명을 강인한 성체로 키워냄을 알고 있습니다.

 

물메기의 유애를 염려하기보다, 물메기의 기개를 찬미하기로 합니다. 물메기를 물잠뱅이라고 부르는 것도 찬미의 한 방법인 것을 이제는 알겠습니다.

 

노파는 부엌의 한 곳에 바다를 옮겨옵니다. 미끄덩한 비늘과 흐물거리는 살점에는 바다가 겹겹이 묻어 있습니다. 조심스레 헹궈가며 바다의 기세를 물에 풀어냅니다. 두꺼운 냄비에 무와 파를 깔고, 그 위에 물잠뱅이를 올립니다.

 

연안에서나마 육지의 향을 맡았을 터, 이제라도 폭신한 흙 내음 사이에서 편히 쉬도록 인사합니다. 싱거운 물을 가득 넣고, 약간의 소금과 맛술, 액젓을 더합니다.

 

이미 바다의 향이 한솥 가득하기에 짭짤한 간이 더 필요치는 않습니다. 필요한 것이라면, 바다에서 겨울을 빚어내는 것처럼 충분히 기다리는 일입니다.

 

노파의 물잠뱅이탕은 꼭, ‘오래 걸리고, 늦게 도착하고, 오래 남는, 겨울의 맛’으로 남습니다.

 

기다림은 깊은 맛의 비법이라, 노파는 늘 말해왔습니다. 깊은 맛을 내는 재료도 대개는 오랜 세월의 산물입니다.

 

간혹 태생부터 고결한 경우가 있지만, 그 소수를 제외하고 나면 시간은 언제나 맛의 비법이 됩니다.

 

거기에 요리하는 시간마저 기다림의 연속이 될 때, 그 맛은 정성의 맛을 가뿐히 넘어섭니다.

 

실은 물잠뱅이의 참맛 또한 몇 세대를 건너오며 만들어진 것입니다. 몇 세대 전까지만 해도 먹을 이유가 없는 해점어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겨울을 대표하는 별미가 되었습니다.

 

바다의 두 노인과 육지의 한 노파처럼 묵묵히 때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한 법입니다. 생과 사의 값어치를 헤아리며 오래 기다리고, 여러 번 우려내는 일, 그 고요한 반복만이 짙은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삶이 한 그릇 요리라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무엇을 닮아 있는지’ 보기보다 ‘얼마나 진한지’를 먼저 맛보고 싶을 것입니다. 물잠뱅이탕 한 그릇이 그러하듯, 우리도 고요한 반복으로 진국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한 그릇 앞에 앉아, 뜨거운 김을 조금 식혀가며 차분히 때를 기다려도 좋겠습니다. 깊은 맛은 늘, 기다릴 줄 아는 사람 쪽으로 먼저 옵니다. 기다리고 우려낸 것만이 끝내 진국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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