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엘리제를 위하여’ 가 트럭의 후진을 돕고 있다. 바람은 냉담 중인데 길섶의 오동나무는 책장처럼 부스럭거린다. 마당으로 나와 바라보다 대문을 열고 다가가니 이삿짐을 싣는 중이다. 이 엄동설한에 이사라니! 누구나 살면서 정착을 꿈꾸지만 정작 지내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피치 못할 사정으로 거처를 떠나야 할 때가 있다. 아이들을 위해 좀 더 넓은 집으로 가거나 계획한 바를 어느 정도 이룬 마음으로의 이사라면 오죽 편할까마는 오늘처럼 추운 날에 이삿짐을 꾸리고 싣는 것은 편치 않은 것 같아 마음 한편이 씁쓸하다. 그동안 자유롭게 왕래하며 지내진 않았어도 이웃의 떠나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 짠하여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다. 짐 싣는 인부들 몫까지 다섯, 여섯 커피, 잔을 세팅해놓고 커피를 분담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왠지 긴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바깥의 소란스러운 발걸음들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고 싶은지 기웃거릴 때 커피포트의 물이 끓기 시작한다. 서둘러 쟁반을 들고 나가 소리쳐 본다. 커피 들고 하세요! 한때 서울에 살면서 전세를 산 적이 있다. 내 집이 아니고 빌려 쓰는 처지가 되고 보니 이웃과 가깝게 지내기엔 왠지 서먹하여 상처를 입고 풀숲에 숨은
둥근 것을 보면 각 잡고 사시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모서리의 힘이 필요했으므로 각의 힘을 빌려 ㅁ처럼 사셨다. 때때로 달을 보면 먹먹해지는 날 먹먹함을 말아 올린 담배 연기에 동그라미를 그려 하늘로 보내곤 했다. 얼 만큼 동그라미를 그려야 둥근 하늘이 될지 모른 채 ㅁ의 문을 열고 나가면 ㅇ를 만날 수 있는데 아버지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근 것들의 안부만 물어가며 그 흔적마저 지우고 사셨다. 태양이 오후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 시간 미움이 마음이 되는 아니, 아니 마음마저 까맣게 놓쳐버린 날
아무리 엎드려도 아픈 소리 내지 않는 철로 위로 바깥 어둠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철컥 , 철컥 지나는 곡선과 직선는 포옹 할 수 없는 흐릿한 장막 같아, 멀어진 길이 만큼 안부의 간격은 불안한 미로였다 저, 묵묵한 마중은 미로를 찾는 일 기운 생각들이 저물어 돌아오는 시간 서천역에 졸고 있던 바람이 눈에 젖는다 몇은 눈발에 젖고 몇몇은 가족 품에 젖는다 지금, 젖는 다는 것은 오랜 지명 속으로 체온을 찾아가는 길이었으므로 떠나는 바람의 방향은 알 수 없으나 외울 수 있는 11시 58분 무궁화호 무궁화 향기에 젖는 역사는 순환하며 꿈틀거렸고 한 번도 허기진 삶을 연착하지 않는 서천역에는 흰 비늘 꽃이 사륵 사륵 쌓였다
지고 피고 지는 것이 어디 나무뿐일까? 굽은 나무 아래 살려면 내 몸이 뒤틀려야 하는 것인데 어린 내게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굽은 나무는 그늘을 옮기는 바람을 봐야 하고 새의 그림자를 읽어야 한다고 넘치면 넘어지는 법이니 둥글게 구르며 살아가라고 하셨다 그늘의 공식을 잊고 살아서 였을까 나는 새의 날개를 꺾기도 했고 비 오는 날은 숲속의 어둡고 습한 방언을 듣기도 했고 나뭇 가지들의 삭히지 못한 이야기는 빗소리에 묻어 두곤 했다 잎은 빗소리를 달고 자랐고 질서가 바뀐 순간 서늘한 목이 잘려 우듬지를 넘어설 수 없으나 그래도 네 이름이 아름다운 건 유배당한 젊음에 햇살 들어 푸르기 때문이었다 멀어진 나무의 푸르름을 손 끝으로 만지면 쌓아 온 볕들이 하나씩 부러졌고 눈 부신 조각들은 다른 시간에 사는 것뿐 같은 공간에 서 있는 것이었다 물과 불이 그랬듯 곧는 나무와 굽은 나무의 공식은 낮아지고 작아져 모든 그늘을 용서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