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분의 대통령 집권 당시 청와대 출입 기자로 그분들의 공사를 가까이서 봐왔고, 기사로 옮겼던 터라, 알려지지 않은 일이 적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1971년 10억 달러 수출을 기적으로 여겼다. 당시 야당은 바닥까지 다 긁어다 판다며 박 전 대통령의 10억 달러 수출을 맹비난했다. 그럴 즈음, 중동에서 손짓했다. 사우디, 리비아 등에서 한국 건설회사를 불렀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건설부 장관과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국내 건설사의 중동진출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사흘 뒤 두 장관은 차례로 독대하며 박 전 대통령에게 ‘중동진출 불가함’을 설명했다. 이유는 중동은 열사의 나라로 모래뿐이고, 모레 위에 튼튼한 건물을 짓기가 어려운데다 한낮 온도가 섭씨 60도까지 올라가 낮 노동이 쉽지 않다고 보고했다. 그런 박 전 대통령은 ‘경제를 키워 국민을 배불리 먹이자’라고 약속했던 정주영 전 현대건설 회장을 불러 이를 물었다. 정 전 회장은 다른 의견을 냈다. “각하, 이런 좋은 찬스가 어딨습니까. 사방이 모레라서 모레 걱정은 안 해도 되고, 한국 인부들이 막걸리를 달라고 할 테지만 이슬람국가라서 술을 마실 수 없어서 좋고요. 밤에는 선선해서 좋으니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됩니다.” 박 전 대통령은 ‘중동진출’을 결정했고, 싼값에 석유를 들여와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이뿐만 아니다. IMF 외환 금융위기라는 숙명적 사명을 갖고 취임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필자의 소속사였던 <대전일보>의 금 모으기 캠페인을 높이 평가해온 김 전 대통령은 5대 재벌 회장들과 오찬 회동을 자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5대 총수들에게 앞으로 IMF 관련, 우리나라 경제가 나아갈 길에 대해 의견을 내달라고 했다. 재벌총수 모두 훌륭하고, 국익과 관련한 나름대로 진단과 계획을 내놨다. 마지막 발언했던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남달랐다. “대통령님, 지금까지 김 대통령님과 정부가 잘 도와주셔서 IT·반도체 등이 기반을 다져 앞으로 25년?, 한 30년? 은 먹고 살게 됐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먹거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경제는 위험합니다. 그러니 대통령님께서 과학기술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과학기술로 먹고살아야 합니다.” 좋다, 싫다 내색하지 않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회동 끝나자마자 김 전 대통령은 “당장 내일 아침 8시에 총리를 비롯해 전 장관, 과기부 장관과 과학기술 단체대표 등을 오시라고 해서 ‘과학기술의 R&D 정책회의’를 갖자”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과 이건희 전 회장 역시 훌륭한 리더십을 보였다. 지난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 1주년이 된다. 여러 가지 잘잘못을 놓고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과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평가가 극과 극이지만, 어쨌든 아쉬움이 큰 1년이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경제침체가 길게 이어진 상황에서 국내 정치와 외교면, 심지어 이태원 참사까지 적잖은 문제로 국론이 나뉘어있는 게 현실이다. 북핵 위협 속에 국내 정치마저 크게 흔들려 여야가 극단적 대결, 그리고 윤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인사들의 잇따른 설화(舌話)까지 빈발해 지지율마저 저조한 현실이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고, 국민을 위해 협치하겠다는 약속을 허언에 그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가가 폭등하고 민생은 팍팍해 더 나은 삶을 기대하던 사람들의 비난도 더 많아졌다. 국가 혈세를 아껴야 한다고 말만 떠들었지, 33조 원대의 적자에 있는 어느 공기업은 직원을 더 뽑고, 또는 승진시켜 다른 부처 연구소로 파견하고, 임금을 30%나 올려도 정부는 질책이 없다. 검사들을 요직에 앉혀 국정을 끌고 가는 정권으로 각인된 지도 오래다. 인명 경시, 패륜, 마약, 재난이 들끓는 윤 정부시대, 어디까지 희망가를 부를 것인가. 여야 구분 없이 머리를 맞대는 것을 포기한 듯한데, 여당 내에서도 갈리고 분열된 상태에서 나라 꼴, 윤석열 정부는 몇 점짜리일까.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하여 1504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갑자사화 때 우리 고장의 인물 중에 수난을 많이 당한 한산이씨 인물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고장(서천군) 화양면 추동리(사성골)과 표동에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목숨을 걸고 직언하여 화를 입은 대사간(大司諫) 이윤번(李允蕃 1460∽1538)의 묘와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의 막내아들 양경공 이종선(李鍾善 1368∽1438)의 두 번째 부인 안동 권씨(양촌 권근 딸) 묘가 자리하고 있고, 기산면 영모리 문헌서원 경내에는 양경공 이종선 묘가 자리하고 있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갑자사화로 인하여 수난을 당한 한산이씨 인물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목숨 걸고 직언한 대사간 이윤번 추동리(사성골)에 연산군의 폭정에 목숨을 걸고 직언한 대사간 이윤번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윤번은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으로 목은 이색의 장남 이종덕(李種德)의 고손자이다. 성종 11년(1480년) 진사시(進士試)-사마시(司馬試)와 성종 23년 (1492년)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연산군 때 사간원 정언(正言-사간원 정6품직)을 거쳐 중종 16년(1521년) 대사간(大司諫-정3품직 국왕에 대한 잘못된 것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관료)을 지냈다. 공(公)이 1504년 정언으로 있을 때 연산군 생모(生母) 폐비 윤씨(尹氏) 사건과 관련된 신하들에 대한 학살 등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이윤번은 국왕의 잘못된 일에 대하여 직언하였다. 연산군 3년(1497년) 5월 3일 왕조실록을 보면, 정언 이윤번이 어머니를 뵙고 돌아와서, 공신들의 외람된 관작에 대하여 잘못을 논하니 연산군이 비답하기를, “대간과 홍문관이 여러 번 건의를 올렸어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하물며 갑자기 한 사람이 하는 간쟁을 듣겠는가? 이 말은 늦었다” 하였다. 그러나 또 공이 아뢰길, “진실로 들을 만한 말이라면 천(賤)한 사람의 말일지라도 반드시 들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소신의 사사로움이 아니요, 곧 국가의 공론이오니 이 말을 늦었다 하지 마시고 빨리 명(命)을 거두소서” 하니 어찰로 비답하기를, “대간은 모두 공론을 주장하는 것이니 어찌 사적인 말이 있으랴. 지금 아뢰는 것은 명분은 공론이기는 하나 실로 의리에 합당하지 않다” 하며 들어주지 않았다. 다음날 4일 공이 또한 아뢰길, “지난번 어찰에 대간은 공론을 주장한다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대간의 말이 이미 공론임을 아시면서도 개정(改正)하지 않으시니 아마 받아주실 뜻이 없는 듯합니다.”하니 국왕인 연산군도 물러서지 않았다. “옛날 중국 주나라 성왕(成王)은 어린 임금이었지만, 동생하고 놀면서 장난삼아 동생을 오동잎을 잘라, 진(晉)에 봉하겠다고 한 것을 두고도 국왕이 한 말이라 실천하게 되었다. 이러할진대, 지금 만일 도로 그 자급을 거둔다면 신하로써 어찌 임금을 믿는 자가 있겠는가?” 하니 공은 다시 아뢰길, “옛날 당나라 태종(太宗)은 지난 어진 국왕들이 한 일이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서슴치 않고 고쳤습니다. 신(臣)은 전하를 요순(堯舜) 이상의 국왕으로 바라는데, 전하께서는 당태종(唐太宗) 이하로 자처하시려는 것입니까? 하였다. 전교하기를, “옛날 탕왕(湯王)이 걸(桀)을 치며 이르기를, 너는 불신함이 없어라 짐은 식언하지 않으리라 하였으니 어진 임금은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 대간의 의사를 보건대, 마치 처음에는 꼬리를 얻으려 하다가, 꼬리를 얻으면 또 머리를 얻으려는 것과 같다. 지금 만일 개정한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다 고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허락하지 않는다”하며 들어주지 않았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공신의 가자(加資-품계를 올려줌)에 관하여 논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사직하였다. 그러나 대사간에 복직을 명하였는데, 다시 사직하였다. 연산군 10년 (1504년) 4월 28일자 왕조실록을 보면, --중략 — 임사홍(任士洪) 등이 의논하길, “이윤번, 곽종범 등이 궁중의 일을 지레짐작하고 입에서 들어내었으니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님이다. 지금 풍속을 개혁하는 때이니, 중한 법으로 다스려 다른 사람들을 경계시켜야 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무릇 국가의 일은 입이 있다 해서 다 말해서는 안 되고, 언관(言官)만이 말하며 언관이라 해도 또한 안 하며 모두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 정사에 관한 일이라면 의당 말해야 하지만, 궁중의 일 같은 것은 어찌 지레 짐작하고 말할 하는 것인가? 아래에 있는 사람이 윗사람을 믿지 않고 그 하는 일을 의심하여 엿보아 말을 한다면, 위에서도 아래를 믿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신징(申澄)과 곽종번(郭宗蕃)은 참수(斬首-목을 베다) 하고 이윤번 등 간관(諫官)은 처벌하지 않았으나 계속 간언하니, 연산군 10년 (1504년) 5월 7일 의금부로 하여금 이윤번을 잡아들여 신징처럼 즉일로 참수하는 형벌로 처리하도록 하였는데, 승정원이 아뢰길 신징은 죄를 자복한 뒤에 처벌하였는데 지금 이윤번은 국문하지 않고 극형으로 하리까? 하니, 우선 도로 가두게 하고, “죄가 신징과 같은 가를 알아보고 보고 하라” 하였다. 또한 연좌 죄를 적용 이윤번의 아들은 장(杖) 80대를 맞고 먼 지방에 노비(奴婢)로 보냈다. 그리고 2년 후 연산군 12년(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고 신원되어, 중종 16년 (1521년) 6월 6일 공은 대사간으로 제수되었다. 공의 딸은 안동권씨 권겹(安東權氏 權韐)에게 출가하여 외손자 권전(權佺)을 낳았고 권전은 지족당 권양(權讓)을, 권양은 수초당 권변(權忭)과 제월제 권성을 낳아 명문가의 집안이 되었다. 이렇듯 이윤번은 국왕의 정사에 잘못된 것을 목숨을 걸고 직언을 다 하였으니 언관(言官) 중의 언관이었다. 2. 갑자사화로 실전된 이종선과 부인 안동권씨 묘 양경공 이종선의 묘는 기산면 영모리 문헌서원 경내 목은 이색 묘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이종선의 첫째 부인은 찬성사 권균(1464 ~1526)의 딸로 아들 이계주(李季疇)를 낳고 일찍 죽었고, 이계주는 사육신 이개(李塏)의 부친이다. 두 번째 부인은 찬성사 權鈞(권균)의 7촌 간인 양촌 권근(權根 1352~1409)의 큰딸로 4남 2녀를 낳고 1456년에 죽었다. 화양면 추동리(표동)의 묘소가 바로 둘째 부인 ‘안동권씨’이다. 이종선의 묘와 둘째 부인 안동권씨의 묘소는 1504년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공의 손자 이파(李坡 1434~1486년)가 부관참시(剖棺斬屍-무덤 속의 시신을 꺼내 목 자름)의 형벌을 받을 때 연좌제에 해당되어 봉분을 파헤쳐 평평하게 만들어 버렸고, 오랫동안 봉분을 쌓지 못하고 있었다.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에게 사약을 내릴 때 공의 손자 이파가 예조판서로 있었다. 그리고 연산군이 즉위하여 이 사건을 문제 삼아 당시의 재상과 언관들에게 죄를 물을 때 이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죄를 물을 수 없었으나, 연산군은 죽은 사람의 무덤의 시신을 꺼내 분풀이로 한명회, 정창손, 이파 등 122명을 부관참시하였고 처형과 귀양의 형벌을 받은 자가 239명에 이른다. 이 사건이 바로 甲子士禍(갑자사화)다. 양경공도 연좌제에 해당되어 형벌로 봉분이 제거되었는데, 반정으로 중종(中宗)이 즉위하였어도 오랫동안 봉분을 회복하지 못했다. 공의 후손인 죽천 이덕형(李德泂)이 지은 죽창한화(竹窓閑話)의 기록을 보면, 어성 신담(申湛 1519~1595)의 외손자인 죽천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은 고조부인 이유청(李惟淸 1459~1531)이 꿈속에 양경공이 나타나 말하길, “내 집이 헐어진지 이미 오래되어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공만이 내 집을 지어줄만하니 공은 잊지 말도록 하라”는 현몽이 있어 꿈이 하도 괴이해서 양경공의 종손인 이질(李秩)에게 말하니, “양경공은 이파(李坡)의 조부이기 때문에 연산군의 갑자사화로 인하여 함께 묘 봉분이 헐리게 되었으며 자손이 미약하고 묘소가 한산에 있기에 아직 고치지 못하였기에 현몽하게 된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유청은 태종 둘째 아들 효령대군 이보(孝寧大君 李補)의 외손자이다. 의정공 이유청은 “이런 일로 보면 사람의 정백(精魄-죽은 혼백)이 오래되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과 또한 무덤은 죽은 사람의 집이 되는 것이 분명하니 자손 된 자는 먼 조상이라는 이유로 소홀히 하지 못할 것이요 무너진 무덤은 고쳐 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 하고, 1528년(양경공 사후 90년경) 친자식들을 보내어 봉분을 다시 쌓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양경공 부인 안동권씨의 묘 봉분은 다시 쌓지 않아 오랜 세월이 흘러 실존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이파(李坡)의 사위인 어성 신담(申湛)은 부친 신영원(申永源)의 묘소로 점지해둔 곳에 치표하기 위해 터를 파는 과정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안동권씨의 지석을 발견하게 되어 실전되었던 안동권씨의 묘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어성 신담의 부친 신영원 묘소의 치표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면 안동권씨의 묘소는 되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성 신담의 부친 신영원은 한산이씨 이윤수(李允秀)의 사위이기도 하다. 안동권씨 지석 발견으로 신영원의 묘는 서쪽편 언덕으로 변경되어 자리를 잡게 되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김경제 서천군의회 의장이 최근 발생한 군의회 관련 사태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표명했다. 김 의장은 지난 15일 군의회 제311회 제1차 정례회 개회사를 통해 “최근 군의회에서 발생한 일로 군민께 실망을 주고, 많은 질타를 받는 점 등에 대해 깊이 사죄드린다”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는 군의회 이지혜 의원의 갑질 논란 등 전반적인 의정 활동의 문제점에 대한 군의회 차원의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면서 김 의장은 군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 방안도 제시했다. 그는 “‘서천군의회 의원과 공무원 등의 갑질 행위 근절과 피해자 보호에 관한 조례안’ 마련을 통해 갑질 방지와 피해자 보호 및 지원에도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이어 올해 1차 추가경정예산 심사와 행정감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의장은 “이번 정례회는 2023년도 1회 추가경정예산 심사와 더불어 행정사무 감사까지 시행하는 중요한 회기인 만큼 빈틈없이 직무에 임해달라”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군의회 의원과 집행부 공직자들은 이번 정례회 기간 중 심사되는 사항이 군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사항임을 명심하고, 내실 있는 정례회가 될 수 있도록 해 달라”라고 당부했다. 한편, 6월 2일까지 총 19일의 일정으로 제311회 제1차 정례회 기간 서천군노인복지조례 개정안 등 27개 조례안건 심의와 올해 1회 추가경정예산안 심의, 행정사무 감사 등이 이뤄진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장동혁 의원(국민의힘/서천·보령 지역구)은 지난 15일 국립생태원이 서천을 널리 알리는 창구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장 의원 이날 생태원을 방문해 조도순 생태원장과 간담회 자리에서 “생태원에 ‘서천’지명을 나란히 적어 서천군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 달라”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생태원의 서천지역 상생협력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라며 “다양한 상생협력 사업을 발굴하는 등 지속 가능한 협력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천 지역사회와 상생할 수 있는 지원책을 마련하기 위해 관련 정책 발굴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약속했다. 또한, 장 의원은 생태원의 에코리움과 국제적 멸종위기 동물 보호시설(CITES) 등을 점검하는 자리에서 국가 생태 주요시설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편 국립생태원은 개원 10주년을 기념해 오는 10월 28~29일 관람객 1만 1,250명에게 서천사랑상품권을 선착순으로 지급하여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할 계획이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이지혜 서천군의회 의원의 의정활동을 두고 갑질이니 정상적 의정활동이니 하는 다툼이 지속되는 가운데 김경제 군의회 의장의 리더십 부재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특히 이지혜 의원이 지난 4일 검찰에 의회 사무과 A 팀장을 포함한 성명 불상자 등을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고소했다. 여기에 이 의원은 같은 날 군청 집행부 B 간부를 공문서위조 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해 이에 따른 법정 공방이 이어질 것으로 보여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군의회는 지난 8일 임시회 본회의를 열고 이지혜 의원 징계 요구에 대해 윤리특별심사위원회 회부 절차에 돌입했다. 이 과정 이지혜 의원은 한 언론사 기자들을 대동해 본회의장에서 취재하려다 의회 사무과 직원들의 제지를 당하는 등의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날 군의회는 지난 10일 윤리특별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12일 윤리특별심사위원회 자문위원회를 통해 징계수위 권고를 결정했다. 이어 이지혜 의원의 징계안은 오는 15일부터 개회되는 제1차 정례회 기간중 윤리특별심사위원회 회부로 심사가 이뤄지며 오는 18일 최종 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의원의 윤리위 회부는 의사과 직원들의 갑질 주장과 함께 C 병원을 불시에 찾아가 응급실, 입원실 등 무단으로 촬영하는 행위로 군의회 위상을 떨어뜨린 것이 주요 쟁점으로 보인다. 반면 이지혜 의원은 sbn서해신문과의 반론 보도 인터뷰를 자청한 자리에서 “갑질이 아닌 정상적인 의정활동이었다”라며 당위성을 강조하는 등 관련 공무원들을 검찰에 고소·고발했다. 또한, 군청 자유게시판을 통해 C 병원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반박하는 등 군의회 의원으로써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이 의원은 군의회가 반듯해지려면 우선 의회 사무과부터 투명성이 보장돼야 한다며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의 업무추진비와 의회 사무과 운영비 사용 등이 구린내가 나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초심을 잃지 않고 의정활동에 임하고 있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군의회의 이런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군민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지역의 한 군민은 “군민을 대변해 군청 행정부를 관리·감독하라고 뽑아줬더니 제 밥그릇들 챙기느라 군민의 대변자는 물론 의장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이지혜 의원의 소신이 맞는다면 이를 의장이 나서서 해결하는 등 물리적으로 의회 사무과 직원들과 의원들 간의 마찰을 해소, 작금의 이런 사태까지 오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꼬집었다. 여기에 같은 당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도 이 의원과 손절에 나서고 있다. 같은 당의 한 의원은 sbn서해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 의원의 의정활동에 의욕이 넘치는 부분은 일정부분 인정하지만, 그간 보여준 이 의원의 의정활동은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원로 정치인들까지 군의회의 수장인 의장의 리더쉽에 대해 아쉬운 입장을 보였다. 군의회 의장을 지낸 한 정치인은 “이번 이지혜 의원의 사태는 군의회 역사상 초유의 사태”라며 “수습이 안 되는 상황에서 지속해서 발생하는 이런 사태를 지켜보는 군민에게 부끄럽기만 하다”라고 고백했다. 또 한 원로 정치인은 “일련의 이런 사태로 확대되기 전에 군의회 의장이 지도력을 발휘해 사전에 수습하는 강력한 지도력을 보여줘야 하는데 이를 방관한 것 같은 의장의 리더쉽이 아쉽다”라고 전했다. 한편 서천군의회 윤리특별심사위원회에 부쳐진 이지혜 의원의 징계 결정에 군의회와 이지혜 의원 간의 법정 공방이 예상돼 앞으로도 군의회 의원들의 의정활동이 순탄하지 않으리라고 일각에서는 우려하고 있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지역 내 어르신 해외 탐방 조례 일부 개정안을 두고 일각의 선심성이라는 주장과 언론보도에 대해 김기웅 군수가 불편한 심기를 보이며 유감을 표했다. 김 군수는 지난 10일 sbn서해신문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 “지역의 어르신을 위한 진정성을 표퓰리즘이라 단정하는 것은 대단히 왜곡된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는 매년 관내 65세 이상 노인들 90명을 선발해 해외 문화탐방을 지원해주는 노인 복지에 관한 조례 일부 개정안을 두고 이를 반대하는 일부 군의회 의원들과 일부 언론들의 표퓰리즘 지적에 대한 반박으로 풀이된다. 군에 따르면 ‘서천군 노인 복지에 관한 조례 일부 개정안’은 노인 국내외 선진문화 탐방사업을 골자로 하고 있다. 군은 지난달 20일까지 조례 일부개정 입법예고를 마치고 조례 규칙 심의회를 거쳐 서천군의회 제1차 정례회에 안건을 제출했다. 김 군수는 이와 관련해 “지역 어르신들이 국내외 문화탐방에 대한 높은 욕구에도 불구하고 관광 인프라 부족으로 인해 적절한 문화생활을 즐기지 못한 것에 대해 해소 차원으로 마련한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65세 이상 어르신 인구가 충남에서 가장 높은 인구 비율을 갖고 있어 어르신 맞춤형 복지 시책으로 노인 복지 문화와 장수 문화가 우리 군보다 발달한 선진국(일본)을 탐방하게 하는 것이 어찌 무분별한 선심성 복지라 할 수 있냐”라고 반박했다. 이어 “이 사업은 내년 총선을 대비한 급조한 사업이 아닌 민선 6~7기부터 군민을 대상으로 선진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지속해서 추진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 2017~2019년 3년에 걸쳐 참전유공자 해외 전적지 순례 행사, 2019년 초등학생 국제 우호 도시 문화탐방, 2019년 중학생 나라 사랑 역사 탐방 해외캠프 등 약 3억 2,000만 원의 군비를 들여 사업을 추진한 사례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한노인회 서천군지회의 특혜 우려에 대해 김 군수는 “보조금 지원 방식으로 운영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이고 공정한 대상자 선정할 것”이라며 일축했다. 군의 열악한 재정 건전성을 고려한 김 군수의 결단도 돋보였다. 이는 지난해 김 군수가 타 지자체처럼 보조금 지원에 대해 형평성을 맞춰 달라는 새마을지도자 수당이나 대한노인회 서천군지회 경로당 회장들의 활동 수당 조례제정 요청에 부정적 견해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김 군수는 “재선에 따른 선심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난해 경로당 노인회장의 활동 수당과 새마을지도자 수당 지원을 배제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라며 반문했다. 그러면서 “어르신들을 위한 순수한 의도를 정치적 시각으로 판단해 진정성을 훼손하는 현실에 유감”이라고 밝혔다. 이어 “청년정책 사업 못지않게 어르신을 위한 복지사업 추진도 필요한 것으로 올해 그동안 참전유공자 해외 탐방과 학생 대상 해외 교류 사업 추진에 이어 어르신 해외 탐방을 시행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김 군수는 “지역의 어르신들이 평생 국가와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한 노고에 위로하고자 추진한 사업인데 때아닌 표퓰리즘 논란에 휘말려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서천군의회가 군민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모름지기 정치란 군민을 걱정해 주는 것이라 했거늘 도리어 군민이 정치를 걱정해 주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으니 군의회에 대한 자성 촉구의 목소리가 거세질 수밖에 없다. 기초의회마저 중앙정치의 줄서기 정치에 혈안이 되어 특정 정당 출신 의원들은 지역 유력정치인의 ‘병풍’ 노릇을 하기에 바쁘고 지역 현안에 대한 협치나 화합은 오간 데 없이 따로국밥 군의회로 변질하고 있다. 군의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인 행정사무 감사의 당위성보다는 군의원들끼리 색안경을 끼고 앉아 반대를 위한 반대에 급급해 의원 간에 고성이 오가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이 같은 군의원 간 불 협치를 조정하고 조율해야 할 의장 또한 부화뇌동하고 있어 군의회의 화합과 협치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군의원들은 군정 관리에 따른 집행부와의 간담회에서 준비 부족으로 헛발질이나 하고 있고, 모 의원은 확인되지도 않은 지인이 제공한 거짓 정보로 군의회의 품위를 훼손했다. 이렇게 군의회의 신뢰가 추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의회 차원의 한마디 사과도 없이 임시회가 끝나고 뜻이 맞는 의원들끼리 자축 만찬을 했다니 가관이라는 단어로도 표현이 무색할 정도이다. 군민은 지역경제가 어렵다며 저마다 하소연들이고, 인구절벽, 청년실업 등 지역 현안들은 산더미처럼 쌓여만 가고 있음에도 군의원들은 오로지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역할에 분주하다. 이렇듯 군의회 의석수 감소로 인해 소수 이기주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지역 정가의 분석이 옳은 듯하다. 아울러 가장 중요한 군의회 의장의 리더쉽 부재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군의회 불협치의 원인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급기야 군의회는 동료 의원을 징계하기 위해 윤리특별심사위원회 회부 절차에 돌입하는 상황까지 다달았다. 게다가 해당 의원이 검찰에 의회 사무과 팀장을 포함한 성명 불상자 등을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고소했다. 또 같은 날 군청 집행부 간부를 공문서위조 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해 이에 따른 법정 공방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유가 어찌 됐든 군의원의 의정활동을 도와주는 의회사무과 직원을 검찰에 고소한 군의원은 과연 임기까지 의정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또한 집행부의 핵심 간부를 공문서위조 혐의 고발로 인한 향후 발생할 법정 공방의 후폭풍은 어떻게 감당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이 같은 군의회의 삐거덕거림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군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군민의 노인 복지를 위해 시급히 시행되어야 할 제도가 일부 의원들의 정치적 판단으로 조례 개정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를 두고 선심성이니 표퓰리즘이니 하면서 집행부 수장인 군수가 상정한 조례안에 대한 찬반 견해로 의원 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는 우려의 목소리마저 들리고 있다. 이것이 무슨 대의정치의 장인 의회냐는 푸념 섞인 조롱의 목소리가 지역 정가에서 기초의회 무용론과 기초의회 폐지론까지 이어지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지방자치의 근간이 되는 기초의회마저 정치적 개인주의로 나뉘어 으르렁거리다 보니 의회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할 리가 없어 보인다. 군의회가 협치와 화합의 길로 다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군의회 의장의 강력한 리더쉽 발휘가 절실할 때다. 의장이 정당을 초월해 대의 명분을 갖고 의회의 화합을 위해 중재 역할에 나서야 한다. 의원 수가 9명일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소수 이기주의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포용의 미덕을 앞세워야 한다. 선거기간 동안 군민들의 머슴이 되겠다고 목이 터지라 외친지 1년여 만에 숙였던 허리는 뻣뻣해졌다. 군정 발전보다는 개인의 자존심과 권위를 앞세우려 한다는 군민의 지적을 군의원 모두가 겸허히 받아들일 때 군의회의 협치와 화합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군의회 의장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이지혜 서천군의회 의원이 지난달 25일 군청 내부 전산망 게시판에 올린 ‘이지혜 의원의 갑질에 대한 군의회 의회사무과 직원들의 입장’이라는 글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지혜 의원은 지난달 28일 sbn뉴스-서해신문 보도 관련해 반론 인터뷰를 자청한 자리에서 “갑질이 아닌 정상적인 의정활동이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사과 직원들이 주장하는 갑질 행위 부분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했다. 우선 전체 의원이 합의한 조례안건 심의 기한을 넘기고 직원들의 전화와 문자, 메일이 무시하고 타 의원이 발의한 조례안에 대해 이 의원 본인을 설득해 보라는 주장에 대해 이 의원은 일신상의 문제로 비롯된 상황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는 “의사과 직원들의 주장과 달리 당시 코로나19에 감염돼 상당히 심하게 앓고 있는 상황에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라며 “온몸이 아프고 정신을 놓을 정도의 몸 상태였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며칠 동안 앓고 있다가 의회 사무실에 가니 이해하기 어려운 조례안이 있어 이를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 상황이었다”라고 전했다. 또 이 의원이 본인의 차가 없어 데리러 올 것과 택시 호출 등의 사적인 요구가 허다했다는 주장에 대해 어처구니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의원은 “어제쯤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제 개인적인 업무로 인해 행사장을 방문했다가 다른 행사장으로 자리를 옮길 당시 의사과 직원에게 서천지역 택시 콜 전화번호를 물어본 경우가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해당 직원이 왜 그러시냐고 물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다시 택시 콜 전화번호를 묻자 택시를 불러주겠다고 했지만, 전화번호를 재차 알려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해당 직원 본인이 시간이 있다며 데리러 가겠다고 한 상황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람사르 습지 도시’ 국외 출장 동행 요구와 정책간담회 자리 참석 요구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의원은 “‘람사르 습지 도시’ 국외 출장 동행 요구는 해당 부서장과 면담에서 나온 얘기로 본인이 꼭 가고 싶다고 하자 의사과에 의원 여비가 있으며 동행할 수 있다고 해 의사과 직원에게 문의했지만, 그런 여비는 없다는 답변을 듣고 해당 부서장에게 다음 기회에 이용하겠다고 한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또 “국회의원 정책간담회에 군수, 군의회 의장, 도의원 등만 참석하면 전반적 현안 파악이 어려워 간담회 참석을 부탁했고 국회의원실에서 거절했다는 의사과 직원의 답변에 본인이 직접 장동혁 의원에게 전화로 문의한 결과, 참석해도 상관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 보좌관 좌석에 앉아 참석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부 의원들의 관외 출장 관련으로 한 직원이 병원에 갈 정도로 강압적 자세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우선 이 의원은 “일부 의원들이 관외 출장을 간 것을 의사과 한 직원으로부터 알게 됐고 본인 역시 가고 싶은 곳이어서 의사과 과장에 어떻게 관외 출장이 진행됐는지 물었으며 이에 의사과 과장은 현재 일부 의원들과 관외 출장이니 복귀해서 보고하겠다는 답을 들었다”라고 전했다. 이어 “복귀하기까지 기다리기에 마음이 급해 의사과 해당 업무를 수행한 직원을 찾아 해당 사업에 대한 자료를 요구했고 해당 직원은 전화 통화시 제 질문에 앵무새처럼 질문 내용을 반복적으로 확인해 답답하니 ‘네’ ‘아니오’라고 답해달하라 한 상황”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해당 직원이 병가를 낸 것도 전화가 안 돼 의사과에 방문해 알게 됐고 관외 출장 자료 요구에 제출하면 되는데 과잉 대응으로 일관하는 일련의 상황이 재밌지 않으냐고 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지혜 의원은 지난 4일 검찰에 의회사무과 A팀장을 포함한 성명 불상자 등을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고소장을 접수해 향후 법적 다툼에 귀추가 주목된다.
갑신정변 삼일천하의 주역 풍운아 김옥균(金玉均)이 꿈꾸었던 개혁은 수포가 되어 망명길로 끝내는 중국 타향에서 측근 홍종우에게 살해되었고, 그의 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였지만, 그의 여동생 김균(金均)은 남편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숨어 살았다. 우리 고장 판교에서 생을 마감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옥균(金玉均) 하면 구한말 1884년 12월 6일에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의 개화당이 낡은 조선의 정치를 개혁하고 세계정세에 맞추어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수구세력과 맞서 일으킨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끝난 주역의 인물이다. 정변의 실패로 끝난 김옥균은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을 때 국내에 남아 있는 그의 가족들은 역시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김옥균의 아버지 김병태는 옥사하고 부인 유 씨는 옥천에서 관비가 되었고,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대구에서 암행어사 유석에게 붙잡혀 금부에서 옥사했다. 김옥균의 여동생 김균(金均)은 피신하여 송병의(宋秉義 - 1997년도 송태호 전 문화체육부장관 증조부)와 결혼하여 살았다. 김균 부부는 서울 경성에서 야밤에 충북 옥천군 청산면으로 피신하였고, 여동생 김균도 음독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남편 송병의는 아내를 살려내고는 거짓 장례를 치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남편 송병의는 살아남은 부인을 새색시로 둔갑시켜 장가를 들었고. 그 후 경상북도 영천군에 숨어 살다가 우리 고장 판교면 판교리 237번지(신문보도 239번지-현 237-1번지) 서당골(감동)에 정착하였다. 김옥균의 여동생 김균이 생존한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40년 8월 14일 매일신보 보도로 알려졌다. 당시 김균의 나이는 87세였고. 판교리 주민들과 그간의 살아왔던 지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되었으며, 당시 일본 경찰이 호구조사를 갔다가 소문을 듣고 생존 사실이 보도되었다. 여동생 김균은 다음 해 1941년 1월 22일(호적기록, 당시 신문 일자 같음)에 별세하였다. 필자가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김옥균의 아들이 살아있었다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매일신보 1941년 2월 13일 자와 2월 14일 자 갑신정변 당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김옥균의 아들이 망명하여 57년 만에 65세 나이로 고모 장례 후 49재를 치르기 위해 판교면 판교리에 찾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당시 매일신보 1941년 2월 13일 자와 2월 14일 자 보도를 보면 김옥균의 아들이 망명하여 피신하면서 살아온 그간의 생존 과정이 보도되었다. 김옥균의 아들 이름은 유금덕(劉金德)으로 성과 이름을 고쳤다. 성은 유씨(劉氏)로 김씨(金氏) 성은 이름 금덕(金德)으로 개명하게 된 것은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박해를 피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망명길에 모친 김만천(金萬千)은 아들한테 “이분 선생님을 따라가라” 하고는 곧바로 자살하였고, 아들 유금덕은 그 선생님을 따라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까지 갔는데 그곳에서는 러시아 이름 <이봔 마르코프>로 사용하였다. 시베리아에 있을 때 알지 못하는 일본인이 “너의 아버지는 지금 일본에 계시니 나와 함께 가자”하여 머나먼 일본 북해도에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대정 2년(1912년)에 유금덕으로 호적 신고(북해도 유봉군 유봉정대자 유봉자촌32번지) 하였다. 북해도에 있는 동안 부친을 만나보지 못하고 20여 년 동안 고기잡이로 생활하였다. 한때는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간신히 나무 조각을 잡고 4일간 떠다니다가 구출되어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유금덕의 호적에 북해도에서 1903년에 일본 여자 상림스에(上林未野)와 결혼하여 2남을 두었으나 부인은 1939년에, 큰아들은 1937년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그 후 1925년 북해도를 떠나 화태(華太-사할린)에 정착하여 살고 있으면서 몇 차례 왕래하였다. 기자의 질문에 “조선에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최근에 선친(김옥균)에 대한 생각이 나서 49재를 치르고 사할린으로 돌아가서 매년 한두 차례 3년을 두고 찾아오다가 4년째에는 조선에 살던, 아니면 사할린에 살던 결정 하겠다”고 하였다. 당시 기자와의 인터뷰에 김균의 아들 송돈헌(宋敦憲-송태호 전 문화체육부장관 조부)과 함께하였다. 김옥균의 후손들이 지금도 사할린에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김옥균 여동생 김균 여사가 왜 판교에서 살았을까? ◇ 판교 정착 이전의 생활 김옥균 여동생 김균 여사는 송병의와 결혼하였다. 김옥균은 1884년 12월 6일 갑신정변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지만, 그의 가족과 친척들은 연좌제로 인하여 참형으로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김옥균의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남편 송병의와 함께 충북, 경북 등 전국으로 숨어 살면서 거짓 장례도 치르고, 새색시로 둔갑시켜 새 장가를 들어 충남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93번지로 이주하였다. 호적의 원적은 보령군으로 서천군 판교면으로 전적 하였음을 제적등본에서 확인할 수가 있었다. 보령으로 이주하게 된 동기는 김옥균의 양아들 김영진 보령군수의 보살핌으로 보령에서 살게 되었다. ◇ 판교 정착 과정 김균 여사의 남편 송병의 사망으로 인하여 아들 송돈헌은 보령에서 서천군 판교면 판교리 237번지로 호적을 전적하여 아들 송돈헌과 함께 살다가 1941년 1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김균의 손자, 즉 송돈헌 아들 송재천(宋在天)은 옛 비인군 이방면 흥내리(현 종천면 석촌리202번지)에 사는 풍양 조씨 조용구(趙龍九)의 딸 조윤생(趙閏生)과 결혼하게 된다. 조용구는 김균 여사의 아들 송돈헌과 절친한 친구였다. 이로써 사돈이 되었다. 따라서 흥림저수지 주변 종천면 석촌리 옆 가까운 판교리로 이주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조용구는 1919∽1921년까지 당시 종천면장과 문산면장을 역임하였다. ◇ 조용구(趙龍九)의 선대 인물 조용구(1883년생) 벼슬을 하지 못했고, 부친 조동협(趙東協)은 철종 2년(1851)에 태어나 고종 17년(1880)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고종 30년(1893)에 예조참판을 지냈다. 종천면 석촌리에는 조동협 예조참판댁 집터가 자리하고 있다. 조용구의 가까운 친인척들은 문산면 문장리에 많이 살고 있으며, 김옥균 여동생 김균의 묘가 판교면 저산리에 있었는데 30년 전에 충북 옥천군 청소면 소서리 선산에 이장하였다가 2007년도 김균의 증손자 송태호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세종시 장기면에 있는 대전묘지공원으로 이장하였다.
효도란 부모님을 잘 섬기는 일을 말한다. 부모는 열 자녀를 힘들다고 하지 않고 키웠건만 10명의 자녀는 왜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못할까? ‘서로 헤어져 사는 것이 편하다’라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부모는 고독에 시달리고 있다. 세상 떠난 후 후회하고 통곡하고 있다.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살아계실 때 효도하라. 시간이 없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는 부모를 선택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식을 주문하여 두는 것도 아니다. 조물주가 주시는 섭리인 것이다. 부모와 자식, 자식과 부모, 창조주가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로 알고 감사 해야 한다. 자식을 긍휼히 여기는 부모 공경은 자식의 도리이다. (시편 103:13) 1. 왜. 효도해야 하는가? ①부모는 자식을 위해 땀과 눈물, 피를 쏟은 결실로 오늘의 자식이 있기 때문이다. 잉태 임신의 수고, 해산의 고통은 죽음의 경계선은 넘는 고통이다. 생명을 내게 준 최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②양육의 수고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였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고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부모님이 아닌가? 자식은 84,000섬의 모친의 젖과 피와 사랑을 먹고 양육된 것이다. 사자소학에도 부생아신, 모궁아신, 유이포아, 은고여천 덕후사지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버지 나를 낳아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고 젓으로 먹여주시고 배로써 나를 품어주시니 그 은혜가 하늘 같고 땅같이 두껍다고 부모님의 크신 은혜를 표현하는 문구이다. ③교육의 은혜이다. 부모는 못 먹고 못써도 자식은 조기교육으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뼈를 깍는 고생하면서 교육 시켰기 때문이다. ④자녀는 부모님의 하늘 같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효도할 이유가 있다. 평소에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불효하다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양육하다 보면 철들어 효도하는 자녀들도 있다. 늦게나마 다행이다. 2. 효도하면 축복의 약속을 받는다. 보이는 부모에게 순종하며 기쁘게 해드리자.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면 땅에는 잘되는 복과 장수의 축복을 받는다 (엡6:1-3) 땅에서 잘된다는 것은 모든 일이 형통한다는 것이다. 효도는 도덕의 중심이 된다. 효도하면 복을 받고 불효하면 반대로 저주받는 것이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면 자식도 본받아 효도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부모에게 불효하면 불효자를 두게 된다.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이다. 옛날 고구려 때에 부모가 늙고 병들어 오래 살면 자식들이 산채로 무덤을 파고 묻는 고려장을 했다고 합니다. 큰 죄를 범한 것이다. 어느 가정에 아버지가 몹시 아파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자식들이 모여서 돈 적게 들기 위해서 상여를 쓰느냐? 마느냐? 다툼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듣고 나서 이놈들아 내가 일어나 걸어갈 테니 조용히 하라고 책망했다고 한다. 부모 앞에서 자식들은 언행 심사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 마음 아프게 하지 말자. 오늘날 웃 사람을 무시하고 부모에게 학대하여 부모와 노인들이 갈 곳 없어 방황하는 노인들이 있습니다. 일찍 목숨을 끊는 부모도 있습니다. 성경은 자녀들아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복 받는 비결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엡6:1-2) 옛날 ‘왕상’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부친은 중병이 들었고 백약이 무효였다. 유명 한의사를 찾아갔더니 잉어를 잡아 구워드리면 낫는다하여 강가에 가보니 추위에 얼음이 두꺼워 깨뜨릴 수가 없어 통곡하고 울며 기도하고 있는데 그때 산에서 갑자기 큰 바위가 굴러떨어져 얼음을 깨뜨려 놓았고 구멍 사이로 잉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고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감사하고 그 잉어를 잡아다가 구워드리니 아버지 병이 고침 받았다고 한다. 효자에게는 시시때때로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3. 부모에게 효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①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②형제간에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 ③최선의 삶으로 걱정을 끼치지 말아야 한다. ④물질로 봉양(奉養)하면서 의복으로, 좋은 음식으로, 보약으로, 보호해드리고 용동을 드리면서 효도 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있는가? 불효하고 있는가? 아직 효도를 못 했으면 지금부터라도 회개하고 부모님께 효도하여 형통의 복을 받자.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의회 2023년 행정사무 감사가 ‘갑질’이 아니냐는 논란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서천군의회의 2023년 서천군 행정사무 감사가 군청사 이전에 따라 감사 일정을 당겨 시행하면서 행정사무 감사의 효율성 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다. 서천군의회는 오는 5.24~ 6/2까지 행정사무 감사를 실시한다는 계획하에 국민의힘 이지혜 의원을 행정사무 감사 특별위원장으로 선임했다. 이에 군의회는 행정사무 감사 계획서를 집행부에 송부, 각 감사 및 조사항목별 감사자료 제출을 요구한 상태이다. 하지만, 2022년 행정사무 감사를 진행한 지 6개월여만에 또다시 행정사무 감사 진행에 있어 코앞에 닥친 현안 해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집행부의 발목을 잡기가 아니냐는 볼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는 6개월여만에 실시되는 행정사무 감사를 준비해야 하는 집행부 앞에는 대규모 조직개편과 군청 신청사 이전 준비 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특히 이번 행정사무 감사도 2019년부터 3년간의 행정사무를 감사한다는 계획하에 특정 의원의 경우 부서별 50여 건의 방대한 사업에 대한 감사자료를 요구해 감사의 실효성이 있을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게다가 지난해 행정사무 감사를 두고 의원 자질론과 맹탕 감사라는 언론의 혹평받은바 있었던 데다가 감사를 빌미로 방대한 서류 요구로 사전에 준비해야 하는 공직자들이 곤혹스럽기만 한 입장이다. 이에 관내 한 시민단체는 법률·조례를 벗어난 권한 행사는 ‘직권남용’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천주민자치참여연대는 지난 25일 sbn서해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군의회 행정사무 감사의 법적 근거는 ‘서천군의회 행정사무 감사·조사에 관한 조례 제6조 제3항’에 의거 감사 또는 조사의 대상 사무를 ‘의회 구성일 이후 처리되는 사무로 한정한다’라고 명시됐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런데도 제9대 서천군의회가 의회 구성일인 2022년 7월 1일 이전의 행정사무에 대해도 감사자료를 요구하고 감사 또는 조사하는 행위는 조례에서 정한 권한 범위를 일탈한 위법행위”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같은 지적이 지난 2022년 행정사무 감사에서도 나왔지만, 군의회가 여전히 조례 규정을 벗어나 권한을 행사하려는 것은 ‘직권남용’의 우려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서천군의회가 집행부의 행정사무 감시는 물론 잘못이 있으면 바로 잡고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법치국가에서 법령·조례 규정을 벗어난 일탈행위는 있을 수 없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군의회가 제정한 조례를 군의회 스스로 지키려 하지 않는다면 지방의회에 대한 신뢰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며 심사숙고가 있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군의회 행정사무 감사의 일정을 앞당긴 부분과 관련한 의문도 제기됐다. 이 시민단체는 “지난해 감사를 한 지 6개월도 채 안 되어 감사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라며 “군청 신청사 이전의 커다란 현안과 청사건립 관련해 꾸준히 제기되는 각종 의혹에 대한 감사 등을 위해 후반기에 행정사무 감사를 해도 늦지 않을 텐데 무슨 이유로 서두르는지 알 수 없다”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 군의회 사무과 김학권 의사팀장은 sbn서해신문과의 전화 통화를 통해 “‘서천군의회 행정사무 감사·조사에 관한 조례 제6조 제3항’에 의거 3년 전의 행정사무 감사를 진행에 있어 문제가 없다”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의회 구성일 이후 처리되는 사무로 한정한다’라는 조례 규정을 벗어난 일탈행위라 지적한 시민단체의 유권해석이 잘못된 것으로 이는 최초(1991년) 군의회 구성일 이후부터 할 수 있는 것”이라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고요한 바다에서는 유능한 선장이 나오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배를 삼킬 듯한 산더미 같은 검은 파도가 들이닥치는 비바람 속에서야 능력 있는 선장이 나온다. 나라도 위기에 빠졌을 때, 진정한 리더가 나오는 법이다. 옛말대로 난세에서 영웅이 나온다. 하지만, 난세에는 비단 영웅만 나오는 게 아니라, 간신도 나온다. 영웅들이 무용담이 눈부셨기에 간신들의 존재가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이다. 중국 고사에 이런 얘기가 있다. 송나라 때 간신의 무리를 대표하는 가사도(賈似道)란 인물이 있었다. 그에게는 배다른 누이가 황제 이종(理宗)의 후궁이 됐다. 그 누이는 미모가 빼어나고, 영민해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종의 총애를 얻어 귀비(貴妃)로 봉해졌다. 그녀는 현명하고 덕이 깊어 황제의 총애를 얻자, 그에게 과장하여 말한다. 가사도의 재능이 출중하고, 지혜롭다고 고하여 기용해 줄 것을 청했다. 사랑에 빠진 이종은 시비를 가리지도 않고 곧 가사도를 중용했다. 감히 누구도 ‘안 된다’라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 가사도는 누이 덕에 출세 가도를 달려 마침내는 승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더니 그는 이종에 이어 도종(度宗), 공제(恭帝)의 3대에 걸쳐 황제 곁에서 권력을 누린다. 이를 소개한 중국 리정이 쓴 ‘권력의 숨은 법칙’에는 가사도가 무덕(無德), 무공(無功), 무재(無才)한 빈 그릇이었다고 소개한다. 심신이 편해진 그는 큰 건달의 습성이 살아나 도박과 여색만 즐겼다. 유람선은 서호(西湖)에서 규모가 가장 컸으며, 그가 거느린 가희의 수만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야밤에 서호에 가면 등불의 밝기만으로도 그의 거처를 알아낼 정도였다. 그가 권력을 쥔 뒤, 조정에는 부패 탐욕 뇌물수수, 매관매직 등 온갖 비리가 성행했다. 그의 집에는 관리가 되고 싶어 하는 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 무렵 징기스칸의 손자 몽케(蒙哥)가 세 갈래의 길로 남송을 침공했다. 가사도는 우승상 겸 추밀사의 자격으로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면서 전권을 휘두르며 나라를 그르쳤다. 황제에게 허위로 전공(戰功)을 보고하면서 자신의 세력만 키워나갔다. 불량배 출신인 그에게 전술이나 지휘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을 치를 용기가 있으리 만무했다. 그는 몽골군이란 이름만으로도 겁을 집어먹었다. 쿠빌라이(황제 몽케의 동생으로 후에 5대 황제)가 양주를 공격해오자 급히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협상을 거부하고 양주로 진격했다. 결국 가사도의 빈 그릇 같은 능력과 허세에 송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중국의 장개석. 모택동, 등소평, 장쩌민, 시진핑 등 근래의 국가주석들은 모두 이 고사를 담을 책을 즐겨 읽었다. 최고 통치자가 인재를 고르고 골라 등용하고 아낀 이유는 자신의 천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물론 서기 290년쯤 있었으니, 1700여 년이 지난 얘기다. 최근 서천군의회 이지혜 의원의 ‘갑질’ 더 나아가 정치 보스의 행태를 보인 점은 서천군민은 어떻게 생각할지 의문스럽다. 지난해 우리 군민은 지방선거를 통해 군민의 대변자를 새로 뽑아 군의회로 보냈다. 특히 젊은 정치인인 이 의원을 선택한 군민의 기대는 남달랐다. 물론 군민이 신이 아니기에 이성적인 판단을 벗어나 종종 자신의 감정과 주관에 따라 선택한 때도 있지만 무엇보다 가사도 같은 무뢰배에다, 무덕(無德), 무공(無功), 무재(無才)한 인물은 아니길 기원했다. 작금에 보여준 이 의원의 정치 보스 행태를 보면,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오죽하면 함께 의정활동의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의회 사무과 직원들이 ‘서천군의회 이지혜 의원의 갑질에 관한 입장’의 글을 올렸을까.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서 정당이나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닌 인물을 보고 뽑자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를 선택해야지, 정치 보스를 뽑아서는 안 된다. 리더는 나를 따르라며 사회의 어려움을 솔선해 푸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위기를 슬기롭게 이기기 위해 함께 미래로 가자고 외친다. 정치 보스는 그 반대다. 우선 사리사욕, 이해타산이 먼저다. 당신들이 하라고 외치는 자들이다. 나라와 사회는 강 건너 불구경하며 남의 탓만 한다. 이것은 상대의 잘못이며, 그 잘못의 책임은 상대에게 있다고 우긴다. 탐욕, 막말, 오만, 독선, 탈법, 무례, 무능, 무책임이 정치 보스의 상징이다. 따라서 정치인은 보스가 아닌 민의의 대변자로 인정받기 위해 무난히 노력해야하는 점을 명심하길 바란다.
[sbn뉴스=서천] 권주영 기자 = 충남 서천군의회 이지혜 의원(사진)의 갑질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오르면서 공직사회와 지역사회에 커다란 파장이 일고 있다. 특히 이 의원 본연의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행정절차를 무시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과다한 자료를 요구, 사적인 업무 지시를 하는 등 정치 보스의 행태를 보인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다. 지난 25일 의회 사무과(이하 의사과) 직원들은 내부 전산망 게시판에 ‘서천군의회 이지혜 의원의 갑질에 대한 의회사무과 직원들의 입장’이라는 글을 올려 이 의원의 갑질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했다. 이들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전체 의원이 합의한 안건은 수 차례 기한을 넘겨 자료를 제출하고 법정 사항인 재산등록과 의회회기와 관련된 직원의 전화와 문자, 메일은 무시됐다”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이 의원 본인이 차가 없다며 의사과 직원들에게 데리러 와라. 택시를 불러 달라라 같은 지극히 사적인 요구가 허다했다”라고 지적했다. 또 “이 의원이 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람사르 습지 도시’ 인증을 위한 서천군의 국외 출장에 동행할 수 있도록 알아봐 달라. 이 의원이 참석 대상이 아닌 집행부의 공식적인 용역보고회와 정책간담회 등에 본인의 자리를 만들어 달라 등의 요구로 집행부와 의사과를 난감하게 만들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의원으로 당연히 검토해야 할 의원발의 조례안을 메일을 통해 수 차례 사전 검토를 요청했으나 별도 의견 회신이 없음은 물론 해당 조례 간담회 불참 후 타 의원이 발의한 조례안에 대해 본인을 설득해봐라. 나는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했다는 등의 적반하장식의 태도를 보였다”라고 호소했다. 관련 조례를 무시한 과다한 자료 요구 등 정치 보스의 행태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의사과 직원들은 “관련 조례의 절차를 무시하고 집행부에 자료를 요구해 개인정보가 포함된 민간사회단체의 운영과 회계에 가공되지 않은 원본 자료를 요구했고 집행부의 제출 자료가 도착했다는 직원의 전화와 문자를 무시하는 등 기초의원의 권한을 넘어서는 행동을 보였다”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지난 12일 군의회 의장의 허락하에 공식적인 절차에 의해 일부 의원이 우수사례 확인차 관외 출장에 대해 이 의원 본인에게 참여 의사를 묻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사과 과장에게 항의하고 출장 신청서, 계획서, 예산 사용 내역. 결과 보고서 등을 요구했다”라고 밝혔다. 또 “이미 의사과 과장에게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의원은 의사과를 찾아 관련 없는 직원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관외 출장 내용을 본인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재차 하의하고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다’라며 의사과 직원들을 비웃기까지 했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강압적인 갑질로 관외 출장 담당 직원이 병가까지 내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호소했다. 의사과 직원들은 “급기야 관외 출장 담당 직원에게 전화해 ‘왜 전화를 받지 않았냐’라고 따져 묻고 ‘이제부터 내가 물어보는 말에 네라고만 대답할 것’을 강요하고 관외 출장 관련 서류를 이메일로 제출할 것과 ‘이 관외 출장을 모 의원이 추진한 거지’라는 강압적인 통화가 이어졌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의원 본인이 속한 정당의 의원까지 참여한 의원들의 관외 출장에 본인이 제외됐다면 출장 간 해당 의원들에게 항의할 일이지 담당 직원에게 해코지하는 것은 전형적인 ‘갑질’”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이 의원의 언론 인터뷰 내용도 거짓이라고 지적했다. 의사고 직원들은 “한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밝힌 ‘나로 인해 직원이 병원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그동안 업무적인 것과 과장·팀장에게 얘기했지 이 직원과는 한 적이 없다’라는 말은 거짓 주장”이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충격으로 치료받고 있다던 이 의원이 의원의 권한 밖인 지역 내 모 병원을 불시에 찾아 응급실, 입원실 등을 촬영하는 상식밖에 행태를 보여 군의회 위상을 떨어뜨렸다”라고 밝혔다. 이어 “군의원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맡겨주신 군민의 성원에 보답하진 못할망정 지속적인 갑질로 5만 군민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군의회를 알량한 갑질 무리로 전락시켜다”라며 이지혜 의원을 강력히 규탄했다. 이들은 “서천군의회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조치로 이지혜 의원을 엄벌해 달라. 군의회 윤리위원회 회부로 책임을 물으라”라며 “국민의힘 정당에서도 이지혜 의원의 행태를 철저히 조사해 당헌·당규에 따라 합당한 처분을 내려달라”라고 촉구했다. 이에 sbn서해신문은 이지혜 의원에게 이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 전화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회신은 없었다.
지난 2009년 10월 말 미군 도버 공군기지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가 비행기에서 내렸다. 새벽 4시, 날이 쌀쌀했지만, 유해를 싣고 온 비행기가 공군기지 활주로에 서자, 모두 숙연했다. 모인 미국 시민들 중앙에는 미군 통수권자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서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영부인과 국무위원, 상·하원 의장, 의원 등과 함께 거수경례로 영접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 미국을 지켜 주신다. 위대한 미국인의 품으로 돌아온 이 자랑스런 고인은 미국의 영웅”이라고 했다. 이어 “민주주의를 사랑하고, 미국을 사랑하고, 미국을 강하고 부강된 나라로 만든 분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이 나라를 지켜 주신 고인의 희생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빌클린 턴 대통령도 미군 전사자의 유해를 맞는 공항에 나가 ‘미국 영웅’이라며 넋을 달랬다. 몇몇 매체 외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지만, 문재인 대통령도 재임 시 마찬가지였다. 몇 해 전 항일 애국지사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최강 전투기의 호위를 받고 국내로 모셔 올 때가 있었다. 우리나라 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인천 공항에서 직접 영접했다. 당연히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 등 국무위원, 집권당 국회의원 등이 문 대통령 부부와 함께 100년 가까이 해외에 떠돈 홍범도 장군을 손수 맞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 당시 10여 년간 청와대 출입 기자를 하던 시절 만났던 분이다. 청와대 민정수석, 대통령 비서실장, 대통령으로 이어지며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갖고 있어, 그의 솔직함과 진정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있었다. 지난 2020년 6월 25일 오후 5시 문재인 대통령 부부는 군 지휘부 등과 함께 해외로 떠돌다 70년 만에 고국으로 환국한 147구를 국민을 대신해 맞았다.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 마련된 유해 송환식에는 미7사 17연대 소속으로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전한 류영봉 이등 중사의 귀국 신고로 시작됐다. 어느새 88세의 노장이 된 류영봉 이등 중사는 문 대통령과 군 지휘부에 거수경례로 귀국 보고를 했다. “신고합니다. 이등 중사 류영봉 외 147명은 2020년 6월 25일을 기해 조국으로 복귀를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문 대통령은 이들 147명의 국군 참전용사와 고인들을 최고의 예우를 다해 경의를 표했다. 국군 전사자 유해 147구는 지난 1990~1994년 북한 개천시, 운산군, 장진호 일대에서 발굴된 유해들이다. 208개 상자와 2018년 1차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후 미국으로 송환됐던 유해 55개 상자 중 두 차례의 한미 공동 감식을 거쳐 국군 전사자로 판명된 유해들이다. 문 대통령은 “우리 선배들의 6.25 참전과 희생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우게 됐다”라며 “온 국민과 함께 추모한다. 해외에서 외로우셨을 참전용사가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셨으니 편히 쉬시라”라고 위로했다. 문 대통령은 이듬해인 지난 2021년 9월 22일 6.25 참전 국군 유해를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 히캄 공군기지를 방문해 국군 전사자 유해 68구를 국내로 모셔 왔다. 주요 국가들이 이날 6·25 전쟁에서 미군 전사자 유해 6구와 국군 전사자 유해 68구를 한미가 서로 인수하는 행사였다. 지난 10일 꽤 인기 있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가 귀국했다. 황기환 지사의 유해 송환식이 인천공항에서 열렸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이나 한덕수 국무총리, 이종섭 국방부 장관 등이 참석 없이 박민식 보훈처장이 나가 유해를 봉환했다. 잔악무도한 일제와 미국 등 열강이 마수를 뻗칠 때 조선인의 기개를 펴며 조선 독립에 힘쓴 황기환 지사. 자료에 의하면 황 지사는 1886년 4월 4일 평남 순천에서 태어나 19세가 되던 1904년 증기선을 타고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1918년 5월 18일 미군에 자원입대해 참전했다. 황 지사는 1919년 6월 파리로 이동해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개최되는 평화회의에 참석하고자 파리에 온 김규식을 도와 대표단 사무를 지원하고 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 서기장으로 임명돼 독립 선전 활동을 벌였다. 1921년 미국에서 워싱턴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전 세계에 식민지 현실을 알리고자 미국으로 장소를 옮겨 독립운동을 폈다. 황 지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위원으로 조국의 독립과 해외 거주 한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활동을 이어오다 1923년 4월 17일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순국해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 묻혔다. 황 지사의 묘소는 순국하고 85년이 지난 2008년 뉴욕 한인교회 장철우 목사에 의해 발견돼 알려졌다. 국가보훈처는 황 지사의 유해 봉환을 위해 2019년과 2022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족보나 유족을 확인할 수 있는 공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법원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국가보훈처와 뉴욕 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설득과 노력을 통해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 측과 올해 1월 31일(현지시간) 파묘에 전격 합의했다. 황 지사 유해는 운구 차량을 통해 대전현충원으로 이동, 이날 오후 2시 독립유공자 7묘역에 안장됐다. 나라의 잃은 설움 속에도 독립운동에 평생을 보내고, 사후에도 이국땅에 묻힌 분이시기에 더욱더 죄스럽고 쓸쓸하다. 더욱더 이 정권의 권력 일인자인 윤 대통령이 그분의 유해를 영접하지 않은데는 분명 유감이다. 천번 만번 애국애족을 외치지만, 우리 선열에 대한 예우와 민족 자존심이 일그러진 것같아 더욱 아쉽다. 왜, 한두 주 전 대구의 프로 야구 개막전에는 파안대소하던 모습을 보였음에도, 독립투사의 귀국에는 외면한 것 때문이다. 그래서 윤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1년 내내 30% 초반에 머무는 것이다. 또 그래서, 야당으로부터 ‘아마추어’ 소릴 듣는 것 아닌가.
한산의 문헌서원과 서천의 건암서원이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러나 문헌서원은 1969년도에 문중과 서천군의 지원으로 복설하여 문화재로 등록되어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건암서원은 아직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두 서원에 대한 창건과 훼철 그리고 복설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리 고장에는 사학의 도장격인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문헌서원과 건암서원이 설치되어 운영하여오다가 훼철된 후 일부는 복설되었고 지금까지도 복설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고장 문헌서원과 건암서원의 창건과 훼철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문헌서원은 목은 이색(李穡)과 가정 이곡(李穀) 선생의 주 배향자로 1574년 사우(祠宇)인 효정사(孝靖祠)로 출발하여 광해 3년(1611년)에 문헌서원으로 사액되었다. 건암서원(建巖書院)은 1577년 명곡정사(鳴谷精舍)로, 명곡 이산보(李山甫)와 중봉 조헌(趙憲) 선생을 주 배향자로 현종 3년(1622년) 명곡서원으로, 숙종 39년(1713년)에 건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이 서원들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모두 훼철되었고 1969년에 문헌서원만 복설되어 현존하고 있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士林) 에 의해 설립된 사설 고등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鄕村自治) 운영기구이다. 서원의 기원은 중국 당(唐)나라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정제화(定制化)된 것은 송(宋)나라 때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 수서원(修書院) 등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주자(朱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열고 도학(道學) 연마의 도장(道場)으로서 보급한 이래 남송(南宋), 원(元), 명(明)을 거치면서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말 유학자 안향을 제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북 순흥(현 영주)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뒤에 소수서원 (紹修書院)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이다. 우리나라의 서원은 그 성립과정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기능과 성격 등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서원이 관인양성(官人養成)을 위한 과거준비기구로서 학교의 성격을 고수하였음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서원은 선례후학(先禮後學)의 기치 아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함양하여 인격을 닦던 사림(士林)의 장수지처(藏修之處-숨어살며 수양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서원은 중종에서 명종까지 초창기, 선조에서 현종까지 발전기, 숙종에서 영조 초까지 남설기(濫設期), 서원이 정리되기 시작하는 영조 17년 이후의 쇠퇴기 등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초창기에는 선현을 봉사하고 유생들의 학문연구와 덕성함양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였으며 그 건립이나 운영에 있어서는 향촌 자치제를 지향하였다. 배향(配享)기준도 학문이 깊고 사문(斯文)에 공이 있는 자로 공론에 합당한 분이어야 가능하였다. 따라서, 국가에서도 사액과 함께 전답, 노비, 서책 등을 내려 장려하였다. 이후 집권세력에 의해 자파세력 확대에 서원이 이용되면서 그 설립이나 사액에 정치권력이 작용하고, 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이에 희생된 의사의 봉사(奉祀)가 성행하면서 점차 남설이 사회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서원의 남설은 현종 말부터 시작하여 숙종 대에 오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데, 이는 이 시기 남·서인 간의 정쟁(政爭)의 격화가 크게 작용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서원을 통한 자기존립(自己存立)을 모색하였던 지방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결부되면서 더욱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서원은 교육적 기능이 약화되고, 사현 위주로 전환되면서 가묘적(家廟的) 성격을 가지는 사우(祠宇)와 구별이 모호해졌으며, 서원·사우를 합하면 약 700개소나 되었다. 이같이 서원의 폭발적 남설은 정치적 사회적 폐단을 심화시켰으며, 따라서 영조 이후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국가적 차원의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되었다. 또 대원군 집정시인 1871년에는 마침내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을 기준으로 하여 1인 1원(院)의 원칙에 따라 27개의 사액서원(賜額書院)과 20개의 사액사우(賜額祠宇)만 남기고 모두 훼철(毁撤)되었다. 당시 충청도의 훼철된 서원은 33개의 원사(院祠)였다. 문헌서원은 선조 9년(1576년) 당시 한산군수 파곡 이성중(波谷 李誠中-전주이씨)가 목은 이색(李穡)의 묘역 아래에 부친 가정 이곡(李穀)과 목은 이색(李穡) 선생을 배향하기 위하여 이곡의 시호의 문효(文孝)와 이색(李穡)의 시호 문정(文靖)의 효와 정을 취하여 효정사(孝靖祠)라는 편액을 걸고 사우를 건립하여 제향하여 오다가 1592년 임진왜란을 거쳐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후손인 이덕형(李德泂 1566~1645년 漁城 申湛의 사위)과 좌의정 이덕형(李德馨 1561~1613년 광주인)에 의하여 이색 선생의 옛 집터인 지금의 한산면 고촌리에 이건 공사를 시작하여 광해 2년(1610년)에 공사가 완료되었으며 많은 선비들이 서원 건립을 청원하여 다음 해 광해 3년(1611년)에 문헌(文獻)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문헌(文獻)이란 뜻은 글을 가르쳐서 깨우치는 서원이라는 뜻도 있다. 또한 건암서원은 지금 문산면 명곡리에 1577년 명곡 이산보(李山甫)가 3년간 시묘 살이 하던 장소에 명곡정사(鳴谷精舍)를 세우고 강학을 하여 오다가 명곡 이산보 사후 헌종3년(1622년)에 그 자리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여 왔다. 그 후에 우리고장 출신 퐁옥헌 조수륜(趙守倫)과 그의 아들 창강 조속(趙涑)을 추가 배향하고 사액을 청원하였으나 불허되었다가 숙종39년(1713년)에 문산면 건암리에 이건하면서 조정으로부터 문산면 건암리(建巖里) 마을에 있다하여 건암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그로써 우리고장의 사립학교인 서원이 문헌서원과 건암서원으로 오랜 기간동안 많은 인재를 길러 냈다. 문헌서원에는 유명한 학자들이 서원장(書院長)으로 활동하였다. 서원장의 인물로는 연산에 살던 명재 윤증(尹拯),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 한산의 군자로 칭송받던 수초당 권변(權忭)선생, 김노경(추사 김정희 부친), 운석 조인영(신정왕후 조대비의 숙부), 동은 정지묵(丁志默) 이 활동하였다. 또 건암서원은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義兵將) 중붕 조헌(趙憲)선생이 왕래 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중봉 조헌(趙憲)선생은 조정에 상소문을 통해 건암서원의 전신인 명곡정사에 이렇다 할 스승이 없는데도 영특한 인재들 많이 있으니 대학자인 송익필(宋翼弼)을 산장(山長)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송익필이 산정으로 활동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전국 서원들은 고종 8년(1871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20개의 사액서원과 27개의 사당으로 47개만 남겨두고 모두 훼철될 때 우리고장 2곳의 서원도 함께 훼철되었다. 그 훼철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공문서가 남아있어 자세히 알 수 있다. 그것이 각사등록이다. 대원군의 훼철 지시에 따라 예조판서(禮曹判書)인 조병창(趙秉昌)은 대원군에게 훼철 대상 서원을 품신하고 재가를 받아 각도의 감영에 시달하여 해당 군현의 수령에게 지시하고 그 처리결과를 보고토록 하였다. 충청도 내 훼철 대상은 문헌서원과 건암서원을 비롯하여 33개의 서원이였다. 처리 과정을 보면 서원에 모셨던 위패는 깨끗한 곳에 매립하고, 서원에서 군역 대신 종사하던 사람들은 군역에 종사토록 할 것이며, 세금이 면제되었던 서원의 토지는 성책하여 세금을 부과했다. 또한, 서원 건물의 목재와 기와는 해당 관청에서 편한 대로 처리하되 영정을 봉안했던 서원은 훼철되지 않은 서원으로 옮겨 봉안해도 되며, 봉안할 서원이 없으면 본손(本孫)으로 하여금 편한 대로 옮겨 봉안하도록 하고 서원의 사액편판(賜額懸板)은 불태우도록 하였다. 훼철된 문헌서원은 제향을 위해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제향하여 오다가 1969년도 현재 한산면 고촌리 옛 서원 터에 중창 복설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장소가 협소하여 어려움이 있어 종중의 논의 끝에 문헌서원의 전신인 효정사가 있던 기산면 영모리 이색 선생의 묘역 주변에 서원의 터를 닦고 중창하였다가 복설된 서원이 협소하여 다시 주변 넓은 부지를 마련하여 2009년도 재 복설 공사를 시작으로 2013년 성역화사업을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건암서원은 복설되지 못하고 훼철 당시 부지만 남아있다. 향후 복설되어야 할 서원이다. 현재 기산면 영모리에 복설된 문헌서원은 이색 선생 최초 신도비의 비명은 태종 5년(1405년)에 河 崙(하 륜)이 지었고, 비석에 새겨 세운 최초의 비석은 세종 15년(1433년)에 세웠다. 비문의 글씨는 고려말과 조선 초 문신이며 서예가인 공부(孔俯)가 썼다. 그 후 임진왜란(1592년)을 거쳐 정유재란(1597년) 때 병화로 인하여 소실되었던 것을 현종 7년(1666년)에 선생의 후손들이 재건립하여 세웠다. 재 건립한 신도비 명은 최초 지었던 하륜(河崙)의 찬문(撰文-지은 글)과 뒷면 신도비 음기는 이색 선생의 손자 이맹균(李孟畇)이가 짓고,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찬(撰-지음)한 글을 첨가하였다. 그 후 우암 송시열의 찬한 음기에 河崙(하륜)의 신도비 명의 부당함을 근거를 들어 1904년에, 하륜(河崙)이 지은 신도비 명을 깎아 지우고 구한말 이조판서와 우찬성을 지낸 李容元(이용원)이 서문을, 독립운동가 송병선(宋秉璿)이 명(銘)을 지었다. 글씨는 대사성을 지낸 이용직(李容稙), 감독은 후손 이호직(李鎬稙) 담당하였다. 이색 신도비는 현재 묘역에서 너무나 많이 떨어져 있다 실측해보니 145m 위치에 있다. 1904년 전면을 깎아 다시 세울 때 위치가 변형된 것 같다. 최초의 신도비 명의 글씨는 조선 초 명필가인 공부(孔俯)가 썼는데 당시 신도비 명을 받고 공부는 세종 15년(1433년) 한산으로 출발하였다. 이색의 사돈(아들 이종선 장인) 양촌 권근(權近)은 공부(孔俯)에게 전송하는 시(詩)를 이렇게 써주었다. 海上多仙境 : 바닷가에 선경이 많으나 韓山一點靑 : 한산의 한 봉우리 더욱 푸르네. 精英鍾淑氣 : 준수한 영재는 맑은 기운이 뭉쳤고 蘊奧發諸經 : 심오한 문장 경전에서 피어났네. 百世師遺範 : 백대에 본받을 규범을 남겼으니 千秋炳列星 : 천추에 별처럼 빛나리로다. 勒碑恩命重 : 비 세우라는 은명이 중하니 可比鼎鍾銘 : 정종에 새긴 글과 견주겠네. 牧隱文冠古 : 목은 문장은 천고에 으뜸이요 河相出藍靑 : 하상의 재주는 스승보다 더 하네 道學眞王佐 : 도학은 참으로 임금 도울 재주이고 詞章出聖經 : 문장은 성경에서 흘러나왔네. 撰碑垂後世 : 지은 비문 후세에 전할 것이요 綴字似秋星 : 쓴 글자 빛남이 가을 별 같네. 又得漁村筆 : 더구나 어촌의 글을 얻었으니 何誇孔鼎銘 : 어찌 공정명만 자랑스러우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