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우리고장 의병장 구암 丘秉大(구병대)선생은 문도들과 함께 신선들이 산다는 아름다운 이곳 경상북도 고령군 있는 道巖書堂(도암서당) 詩(시)모임에 참석하여 이곳에서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金沔(김면)장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며 시를 남겼다. <편집자 주> ◯ 구암 丘秉大(구병대)선생은 문도들과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칠등리에 있는 道巖書堂(도암서당) 詩(시)모임에 참석하였다. 구암 선생은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洞中天(동중천) 즉, 신선이 산다는 이곳 명승지 道巖書堂(도암서당)에 함께하였던 사람들이 줄지어 참석하고 있다. 이곳은 정말로 이 세상에서 없는 별천지로 푸른 산에 집들이 보이고 골짜기에 물은 흐르고 있고, 이곳에 사람들이 찾아오니 때마침 새가 울어주고 활짝 피었던 꽃잎들이 떨어지며 마침 비가 내려서 이슬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바람과 물안개가 일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경치를 드러내고 있으며. 구암 선생은 가까운 시기에도 모임에 참석하였지만 이처럼 보기 좋은 모습은 처음 보았고 함께 하였던 사람들이 잠시 술자리를 마련한 자리에서 감탄하면서 모두가 축하는 모습들이다. 이곳 道巖書院(도암서원)은 현종7년(1
丘秉大(구병대1858〜1916)선생은 1891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과거시험보다는 자신을 위한 학문에 힘을 쏟으며 2차 홍주의병에 참여 후 시초면 신곡리 고향에서 은둔하며 세월을 보내지만 친일세력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시로 항변하고 있다. ◯ 구암 丘秉大(구병대)선생은 고종28년(1891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과거시험 보다는 자신을 위한 학문에 힘을 쏟았으며, 연제 宋秉璿(송병선)의 문하에 출입하여 문도들과 교유하였다 조정은 친일세력에 의하여 국권을 뺏기는 등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보고 매일같이 통한하다가 참판 閔宗植(민종식)이 홍산 지티에 서 2차 홍주의병 창의 때 문도들과 함께 의병에 참가하였으나 일본군대의 지원으로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둔하던 봄날에 혼탁한 세상을 생각하며 힘없는 자신의 처지와 선비로써의 몸가짐과 행동 그러나 자신은 굽히지 않고 항변을 시로써 토해내고 있다. 구암 자신이 읊은 시를 보면, 자신을 굶주린 선비로 학에 비유하며, 힘없는 백성들의 처지를 생각하고 고달픈 삶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이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으며, 밖을 나서지 않는 처지라 싸리문은 굳게 닫혀있다. 세상
丘秉大(구병대1858〜1916)선생은 충북 영동군 심천리에 살고 있던 매제 宋泰憲(송태헌)을 찾아갔다가 매제와 영동천 초강 나루 배에 오르면서 헤어지며 지극한 남매의 정을 나누며 아쉬움을 시로 남겼다. ◯ 宋泰憲(송태헌)은 본관 恩津宋氏(은진송씨)로 부친은 고부군수를 지낸 少石(소석) 宋秉弼(송병필1854〜1903)이며 고향은 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420-2이다. 구암 丘秉大(구병대)선생과 남매지간이며, 구암 부친 丘民濟(구민제1841〜1921)의 사위이다. 宋泰憲(송태헌) 형 宋復憲(송복헌1874〜?)은 1891년에 구암 구병대 선생과 같이 과거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과거시험으로 인하여 알게 되었을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멀리서 서천에 사는 구암 구병대 선생과 학문적으로 교우하면서 인연을 맺고, 또한 연제 宋秉璿(송병선)선생이 서천군 문산면 문장리 옛 풍옥헌 趙守倫(조수륜) 舊宅(구택)에 출장 강학할 때 제자가 되었다. 그 후 송복헌과 스승 송병선 선생의 주선으로 집안 宋泰憲(송태헌)이 妹弟(매제)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추후 宋氏 족보로 확인하면 인연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본 詩(시)는 구암 구병대 선생이 妹弟(매제) 宋泰憲(송태헌)